낭만 가득한 꿈의 경주, 밀레 밀리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드 레이스.” 엔초 페라리는 살아생전 밀레 밀리아를 이렇게 불렀다. 밀레 밀리아의 전설 타치오 누볼라니는 밀레 밀리아를 칵테일에 비유했다. “모든 재료의 이름을 하나하나 말할 순 없지만, 한 번 맛보면 그 맛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오늘날 자동차 애호가 사이에서 꿈의 경주로 통하는 밀레 밀리아의 시작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오래전 브레시아 사람들은 자기 마을과 주변 지역을 이탈리아 모터스포츠의 발상지로 여겼다. 1921년 자국에서 처음 열리는 이탈리아 그랑프리도 유치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서킷을 새로 개장한 밀라노 북부 몬자에 개최지를 뺏기자 이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4년 뒤, 지방 귀족 콘테 아이모 마기가 고향의 영광을 되찾고자 친구 프랑코 마조티 백작, 지오반니 카네스트리니, 렌조 카스타그네토와 함께 브레시아를 위한 자동차 경주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전 세계 자동차 애호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밀레 밀리아의 태동이었다. 경주 콘셉트는 로드 레이스로 가닥을 잡았다. 라이벌 밀라노의 전철을 밟기 싫어서 새로운 서킷을 만드는 일은 일찌감치 아이디어 구상에서 제외했다.

브레시아에서 출발해 로마까지 달리자는 제안은 자칫 영광을 로마와 나눌 수 있기에 탐탁지 않았다. 브레시아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로마를 경유해서 다시 브레시아로 돌아오는 코스로 최종 확정했다. 1000마일 (1600km)에 달하는 거리를 확인한 마조티가 “소노 밀레 밀리아(1000마일 이네요)!”라고 외쳤는데, 경주 이름이 감탄 섞인 그의 이 외마디 외침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밀레 밀리아를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은 탄탄한 조직력이었다. 1분 간격으로 빠른 차가 느린 차보다 먼저 출발하는 오늘날 랠리 방식과 달리, 차체와 배기량이 더 작은 차를 먼저 출발시키면서 대회 운영이 한결 수월했다. 경주를 위해 폐쇄했던 도로를 오래지 않아 다시 개통했고, 덕분에 경기 진행을 돕는 통제 요원도 장시간 세워 둘 필요가 없었다. 결승선까지 걸린 시간을 쉽게 계산하기 위해 참가하는 모든 차의 번호는 출발 시간을 기준으로 정했다(예를 들어, 오전 9시 12분에 출발한 차에는 912번을 매기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이탈리아 사람만 참가했다. 주최 측이 외국인 유치에 실패한 까닭이다. 1957년까지 열린 24번의 오리지널 밀레 밀리아 경주 중 비이탈리아 출신 우승자는 두 명뿐이었다. 첫 번째 주인공은 메르세데스-벤츠 SSKL을 타고 16시간 10분의 신기록을 세운 당대 독일 최고 드라이버 루돌프 카라치올라였다. 어찌 보면 외국인인 그의 우승이 밀레 밀리아가 단순히 지역 이벤트로 남지 않도록 해줬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외국인 우승은 24년 뒤에 나왔다. 스털링 모스가 메르세데스-벤츠 300 SLR을 타고 세운 10시간 7분 48초는 여전히 아무도 깨지 못한 대기록이다.

밀레 밀리아는 당대 뛰어난 드라이버를 전 세계에 소개하는 무대이자 페라리, 알파로메오, 마세라티, 포르쉐, BMW 같은 완성차 제조사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는 자리였다. 오늘날 전 세계에 불티나게 판매되는 그랜드 투어링카, 즉 GT카의 탄생을 주도한 무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전 문제가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경주를 시작한 1927년부터 30년 동안 밀레 밀리아에서 56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기술 발전은 엔진에 집중됐고, 브레이크와 타이어 개발은 강력한 엔진 성능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었다. 1950년과 1953년 두 번의 밀레 밀리아에서 우승한 지아니노 마르조토가 “속도를 시속 300km까지 올리는 건 쉬워요. 문제는 차를 멈추기가 어렵다는 거예요”라고 했던 말은 안전에 취약했던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낸다.

관중도 운전자와 마찬가지로 위험에 노출됐다. 1938년 어린이 7명을 포함한 10명이 사망하고, 23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한동안 대회 개최 중단을 명령했다. 이후에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몇 년 동안 대회를 못 열다가 1947년에 재개됐다. 안타깝게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57년, 결국 밀레 밀리아의 종식을 가져온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페라리 V12 4.0L 335 S의 충돌이었다. 결승선을 40km 남기고 앞타이어가 터졌고, 통제 불능이 된 차는 전신주를 들이받고 개울을 뛰어넘어 관중을 그대로 덮쳤다. 이 사고로 안에 타고 있던 스페인 드라이버 알폰소 데 포르타고와 코드라이버 에드먼드 넬슨, 그리고 9명의 관중이 목숨을 잃었다. 안타깝게도 사망자 가운데 5명은 코스를 따라 서 있던 어린이였다.

관중 속으로 날아든 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 회전하면서 20명이 더 다쳤다. 포르타고는 경주에서 필사적으로 우승하고 싶었고, 타이어 교체를 너무 미룬 게 화근이었다. 이 사고로 페라리는 소송에 휘말렸다. 두 번째 충돌 사고는 트라이엄프 TR3을 운전하던 조셉 코트겐스의 목숨을 앗아갔다. 비극적인 참사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공공 도로에서의 자동차 경주를 일체 금지했다. 오리지널 밀레 밀리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20년이 지난 1977년, 밀레 밀리아는 클래식 및 빈티지 자동차를 위한 정규 이벤트로 부활했다. 과거처럼 몇 개 구간만이라도 전속력으로 질주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클래식카 순회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참가할 수 있지만, 참가 자격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일단 밀레 밀리아에서 인증하는 1957년 이전 생산 자동차가 있어야 하고, 참가비로 7000유로(1000만원)를 내야 한다.

올해 대회는 6월 11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5단계로 진행된다. 전통에 따라 브레시아-로마-브레시아 코스는 유지하지만, 흥미를 더하기 위해 그사이를 채우는 코스는 매년 달리한다. 올해는 튜린과 비아레조를 지나 로마에 도착하고, 볼로냐를 거쳐 돌아온다.

박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