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일해도 2년마다 재계약…건보공단 상담사 900명의 농성
민주노총 정규직 노조에선 반대 목소리까지
“빨리 가서 상담하고 싶습니다. 지금 고객들이 각종 보험료 정산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너무 걱정됩니다. 저는 국민건강보험 상담사입니다.”(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지부 경인지회 조합원)
지난 9일 낮 12시께 강원도 원주시의 국민건강보험공단 정문 앞. 외부 식당을 찾는 직원들의 발길이 바빠야 할 정문 앞은 경찰차로 가로막히고, 본관 건물 앞엔 비정규직인 고객센터지부 조합원의 건물 진입을 막기 위해 공단이 버스를 여러대 세워 차벽을 만들었다. 바로 앞 주차장엔 정규직 고용을 요구하는 조합원들이 설치한 색색의 텐트 100여개가 깔렸다.
이런 공단 풍경은 지난 1일 시작됐다. ‘연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전환’ 구호를 걸고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고객센터지부 소속 조합원 900여명이 파업과 함께 공단 앞 농성을 시작하면서다. 이는 사실상 2017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풍경이기도 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이틀 만인 2017년 5월12일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다.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업무는 사용자가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시대의 흐름을 수용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2383일이 지난 2023년 11월20일까지도 여전히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한 건보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7년째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공단 소속기관으로 전환한다는 내부 합의가 만들어지고, 노조와 공단,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노·사·전협의회가 만들어져 20차례 이상 논의가 이뤄졌지만 전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 탓이다. 지난 9일 공단 앞에서 단식투쟁 중인 이은영 건보공단 고객센터지부 지부장과 여현옥 대구 지회장을 만났다. 이 지부장은 2021년 18일간 단식농성을 한 뒤 2년 만에 다시 단식에 들어가 이날로 20일째를 맞았다. 여 지회장은 14일 건강상 이유로 단식을 중단했다.
■ 2017: 자율에 맡겨진 ‘정규직화’ 꿈
문 대통령의 인천국제공항 방문 두달 뒤인 2017년 7월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은 1·2·3단계로 나뉘었다. 1단계는 중앙행정기관, 지방공기업, 지방자치단체 등 835개 기관, 2단계는 지자체 출자·출연기관, 지방공기업 자회사 등 600개가 대상이다. 3단계는 민간위탁 사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했다. 1·2단계는 전환을 하는 공공기관 중심으로 분류한 반면, 3단계는 전환이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범주 가운데 위탁업체를 따로 구분한 것이다. 공공기관들이 민간에 위탁한 사무는 1만99개, 수탁기관 2만2743곳에 업체 노동자 19만5736명이었다.
여 지회장은 입사 9년차이던 2017년 정부 발표를 보고 정규직화의 희망을 품었다. 2년마다 용역업체와 재계약을 하거나 입찰에 따라 업체가 바뀌지 않아도 되고, 전국 12개 센터별로 서로 다른 처우가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건보공단 고객센터는 공단이 11개 민간 협력사와 2년 단위로 도급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전국 7개 지역에서 상담사 1600여명이 일한다.
1·2단계에선 96%에 해당하는 19만8558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 중 4분의 1은 자회사 설립 방식이었다. 2019년 정부는 ‘민간위탁 정책추진방향’ 발표 때 ‘개별 기관 자율’ 방침을 밝혔다. 기관이 알아서 전환 방식을 결정하라는, 자율의 옷을 입은 무관심이었다. 당시 노동계는 정부가 사실상 정규직 전환을 포기했다며 반발했다. 생활 쓰레기 수거·운반이나 콜센터 업무 등은 민간위탁과 용역 사이 경계가 모호했다. 기존 파견·용역과 위탁계약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혼란이 일었다.
건보공단 콜센터와 비슷한 처우에 있는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 등은 2019년 고객센터 업무를 용역 업무(2단계)로 분류해 별도 직군을 신설한 뒤 직접고용을 하는 방식으로 정규직 전환을 마쳤다. 하지만 정책 실시 기간이 늘어지면서 3단계 민간위탁 기관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점차 줄었다. 건보공단은 상담 업무의 독립성을 강조해 고객센터 업무를 3단계 민간위탁으로 분류했다. 이 지부장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고, 더구나 기관 자율에 맡긴 소속기관 전환은 더뎠다”고 말했다.
■ 2021: ‘소속기관 전환’ 결정 뒤 20여 차례 노·사·전 회의 공전
정부 정책추진방향에 따라 2019년 공단과 정규직 노조, 전문가가 참여하는 ‘고객센터 민간위탁 사무논의협의회’가 구성됐으나 정작 당사자인 상담사들은 배제됐다. 논의는 10월 한 차례 회의로 끝났다. 이후 협의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이 지부장을 비롯한 고객센터 상담사들은 2019년 12월 노조를 만들고 2021년 2·6·7월 세 차례 파업을 하며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이후에도 논의는 계속 헛바퀴만 돌렸다. 전환 대상, 채용 방식, 처우 개선 등을 논의할 노·사·전협의회는 2022년 7월에야 만들어졌다. 노조는 재직자 전원을 2023년 1월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소속기관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폐지하는 등 처우를 개선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공단은 ‘컨설팅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거나 ‘이사장 자리가 공백이다’라는 등의 이유를 들며 논의를 미뤘다. 올해 2월 열린 10차 회의에서도 노조는 “3월 말 업체 계약 만료를 고려하면 올해 12월에는 (공단 소속기관의) 서류상 설립을 끝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공단은 “협의 6개월, 기재부 승인 6개월과 행정처리 등을 합해 2년은 소요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게 노조 설명이다. 이 지부장은 “공단은 정부 가이드라인 얘기만 하면서 제대로 된 논의도 하지 못했다”며 “전환 대상 등에 대해 실무협의회 회의만 열일곱번 이어질 동안 결정 권한이 없는 실무진은 성실하고 책임 있는 논의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같은 민주노총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소속인 정규직 노조에선 2019년부터 이들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노·사·전협의회에 참여하는 정규직 노조는 이들 상담사들의 정규직 전환 논의에 태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이들은 이 지부장 등의 단식 이틀째인 2일엔 “국민건강보험공단노조는 고객센터지부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불필요한 발언 등으로 조합원 간 갈등 유발을 자제해달라”며 “공단 쪽은 조합원의 업무량 가중 해소와 민원 업무 정상화를 위해 대책을 수립하고 협상을 진행하라”는 의견문을 냈다. 건보공단노조 쪽은 이와 관련한 한겨레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 2024: 뒤늦게 40%는 시험 보라는 공단
지난달 26일 노·사·전협의회 자리에서 공단은 처음으로 공식안을 내놨다. 정부의 3단계 민간위탁 정책추진방향이 발표된 2019년 2월 이전 입사자는 소속기관 노동자로 전환하되, 이후 입사한 700여명은 공개 경쟁을 거쳐 채용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상담사 1693명 중 41.3%에 해당한다. 이들은 신규 응시자와 함께 △서류전형 △필기전형(직업기초능력평가·NCS) △인성검사 △면접전형 등을 치르라는 얘기다. 여 지회장은 “사실상 해고 통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4년10개월 넘게 일해온 직원들도 있는데, 이들이 일해온 시간은 무시한 채 과도한 채용 절차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콜센터 직원들이 하는 업무가 1091가지이고, 신입이 들어와서 익히는 업무 책이 2158페이지짜리”라며 “6개월 정도면 70% 정도가 못 견디고 퇴사할 만큼 힘들어하는 업무인데, 공개채용으로 업무 공백이 생기면 그 손해를 보는 건 결국 국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단 관계자는 한겨레에 “정부 가이드라인상 정해진 절차대로 할 수밖에 없다”며 “경력을 인정해서 가산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다는 게 협의회에서 논의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정부 가이드라인은 정규직 전환 때 업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바로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전환 채용을 원칙으로 하되 전문직 등 청년이 선호하는 일자리는 경쟁 채용하도록 했다. 건보공단은 2021년 10월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공단 정규직 채용은 행정직·요양직·전산직 등이며, 상담직은 없다. 취업준비생 대부분이 공단 정규직 시험을 준비고 있지만, 상담직을 원하는 분은 소속기관인 고객센터의 채용 계획에 따라 지원하면 된다”고 해 고객센터 업무가 청년층의 선호 업무가 아님을 밝힌 바 있다.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은 모양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한겨레에 “워낙 기관이 많고 민간 자율 영역이다 보니 3단계 기관에 대한 실적은 따로 관리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새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은 도로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말 기준 공공기관(부설기관 포함) 362곳의 간접고용이나 시간제·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는 5만4277명으로, 2021년 말보다 317명(0.6%) 늘었다. 2019년 이후 첫 증가세다.
전문가는 정부의 방관이 이런 지지부진한 정규직화와 노동자 반발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학 교수(경영학)는 “전환을 결정했다면 현재와 같은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가 소속기관 논의를 진전시켰어야 맞다. 공단 책임도 작다고 할 수 없다”며 “정규직화의 정책적 효과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비정규직에 대한 (정부의) 문제의식 자체가 사라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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