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의 치매, 이야기](8) 영화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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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작고한 이순재 배우는 성찰적인 노년 삶을 극에서 잘 보여 주었다.
그가 치매 노인의 역을 맡은 이 영화는 제목부터 중의성을 띤다.
치매 때문에 오히려 현실 삶의 가치를 깨닫기도 하지만 망각 사이사이로 찾아온 그 현실 속에서 치매인의 고통은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정작 자신은 그 사실조차 온전히 잊어버린다는 점에서 치매는 모두에게 힘든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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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기만 한 질병 아닐 수도 있음을

얼마 전에 작고한 이순재 배우는 성찰적인 노년 삶을 극에서 잘 보여 주었다. 영화 <로망>도 그 하나이다. 그가 치매 노인의 역을 맡은 이 영화는 제목부터 중의성을 띤다. '로망'이자 '노망'인 것이다. 단순히 언어유희가 아니다. 흔히 노망 곧 치매라고 하면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픈 노년의 삶이 로망처럼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제목을 통해 말한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치매를 앓고 있다는 설정이다. 보통 치매 서사는 환자 한 사람을 중심으로 가족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영화는 치매 환자 두 사람의 상호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조남봉은 75세의 개인택시 기사이다. 고령에도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이유는 결혼까지 했으면서 반백수 상태로 얹혀사는 아들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의 가족은 삼대가 복작거리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어느 날 조남봉의 아내인 이매자에게 치매가 찾아온다. 이후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젊은 시절에 일에 바쁜 남편의 무관심으로 첫딸이 죽었다는 생각에 그때로 돌아간 의식 상태에서 남편과 그의 택시에 여과없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결국, 감당할 수 없게 된 조남봉은 아내를 요양원에 보낸다. 이후 그에게도 계속해서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고 그 끝에 조남봉 역시 치매 진단을 받게 된다.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지. 심심치도 않고."
조남봉은 자신이 아내를 돌보겠다고 선언하고는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노부부만 남게 된 집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챙겨주며 익숙지 않은 생활을 시작한다. 그것은 힘들지만 현실의 소중함을 발견해 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둘은 끝까지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정신줄을 놓지 말자고 서로 독려한다. 정신이 맑을 때면 도화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 놓으면서 서로 소통한다. 지금껏 말하지 못했던 애틋한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 대답하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계속된다.
그러나 망각 속에서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기도 하다. 어느 날 자신 때문에 가족이 큰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이매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다행히 이를 발견한 남편 조남봉의 신속한 대처로 목숨은 구하게 되지만 이 사건은 두 치매 환자가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의 무게를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두 부부는 예쁜 하와이 커플 남방을 입고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의 목적은 죽음이다. 두 사람의 신혼여행지였던 바다에서 아내는 정말 즐거운 순간을 느끼면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조남봉은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치매 때문에 오히려 현실 삶의 가치를 깨닫기도 하지만 망각 사이사이로 찾아온 그 현실 속에서 치매인의 고통은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정작 자신은 그 사실조차 온전히 잊어버린다는 점에서 치매는 모두에게 힘든 질병이다. 그래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죽음의 선택으로 연결되는 아이러니한 비극을 낳기도 한다.
치매 환자의 삶은 망각과 현실이라는 경계에 서 있다. 그 세계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힘들기도 하지만 치매의 시간은 오히려 평생 말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내 자식을 위해 살다가 이제 자신을 위하여 살아도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라면 치매는 어쩌면 가장 슬픈 질병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답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