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물을 폭파시켰지만" 오히려 일본의 총리가 충격 먹은 '이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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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을 가로막은 식민 통치의 상징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본이 조선 통치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경복궁 중심축을 일부러 비켜선 위치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화문 뒤편 근정전과 일직선으로 이어져야 할 조선 왕조의 상징 공간 한가운데를, 거대한 석조 행정청사가 가로막으면서 “조선 왕권은 끝났고, 새로운 통치 권력이 이 자리를 대신한다”는 메시지를 과시한 셈이다. 이러한 배치와 규모 때문에 건물은 광복 이후 내내 ‘민족 자존심을 짓밟는 상징’으로 인식됐고,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철거 요구가 반복됐지만, 건축사적 가치와 행정·박물관 용도 등을 이유로 실제 결정은 수십 년간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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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와 철거 결정

조선총독부 청사의 운명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급물살을 탔다.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6개월 만에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광복 50주년인 1995년부터 철거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는 이 건물 철거를 “민족의 자존과 민족정기 회복,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했고, 문화계와 시민사회 일각의 보존론에도 불구하고 임기 내 해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정부는 철거 부지를 활용해 경복궁 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이전을 추진한다는 계획도 함께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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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15일, 돔 해체로 시작된 1년 3개월

철거는 상징성을 고려해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정오에 중앙 돔부 해체를 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후 지상 구조물 전체를 완전히 해체하는 작업은 약 1년 3개월 동안 이어졌고, 1996년 11월 13일 마지막 잔해가 철거되면서 일제 통치의 상징 건물은 서울 도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국내 여론 조사에서는 국민 다수가 ‘철거 찬성’ 입장을 보였고, 현장에서는 해체를 지켜보며 “식민 잔재 청산의 역사적 장면”이라고 평가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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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의 충격과 “기억의 건축” 논쟁

조선총독부 철거 소식은 일본 언론과 관광객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도쿄와 오사카 주요 신문들은 “일본 통치의 상징 건물이 사라졌다”, “전후 한일 관계를 상징하던 유산의 해체”라는 제목으로 연달아 보도하며, 한국 정부의 결정을 비판하거나 아쉬워하는 논조를 보였다. 일부 일본 정치인·학계 인사는 “건물을 남겨 식민 지배의 역사를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며 해체에 유감을 표했고, 일본 내 보수 성향 인사들 사이에서는 “한국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반응도 제기됐다. 반대로 한국 쪽 연구자들은 “가해국이 보존을 요구하는 건물에 피해국이 계속 억눌릴 이유는 없다”며, 건물을 유지한 채 ‘기억의 박물관’으로 쓰자는 주장은 정서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웠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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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제자리 복원과 독립기념관으로 간 첨탑

조선총독부 철거 이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본래 위치와 방향을 되찾는 복원 공사가 본격화됐다. 1960~70년대 도로 정비와 청사 건립 과정에서 북쪽으로 옮겨지고 약 3.7도 틀어진 채 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되어 있던 광화문은, 2006년부터 전통 목조건 축으로 다시 지어져 2010년 8월 15일 원래 자리와 축선에 맞춰 공개됐다. 한편 조선총독부 건물의 중앙 돔 상부와 일부 석재는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식민 지배와 철거 과정을 설명하는 전시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 건물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보다는, 일부를 해체·이전해 ‘반면교사’로 남기는 방식이 선택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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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이냐 철거냐… ‘어려운 유산’과 마주한 한국 사회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는 한국이 식민지 지배의 물리적 흔적, 즉 ‘어려운 유산(difficult heritage)’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촉발했다. 한편에서는 “건물을 남겨두고 식민 지배의 잔혹함을 교육해야 한다”는 보존론이, 다른 한편에서는 “치욕의 상징을 수도 한복판에 계속 둘 수 없다”는 철거론이 맞섰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철거와 일부 이전 전시라는 절충을 선택했고, 이후 다른 일제 잔재 건축물·기념물에 대해서도 ‘철거·이전·재해석’ 등 다양한 방식의 처리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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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된 건물”이 남긴 것: 민족정기 회복과 미래 세대 교육

조선총독부 건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식민 지배의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거 과정과 그 후속 복원·전시 작업은, “기억을 지울 것인가, 기억 위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국 사회에 던졌다. 광화문과 경복궁이 본래의 축선과 모습으로 복원되고, 독립기념관에 이전된 첨탑과 사진·기록들이 교육 자료로 활용되면서, 이 건물은 물리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민족정기 회복의 상징 사건’으로 현대사 교과서와 전시 공간 속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일본이 한때 자국 통치의 영광처럼 여겼던 건물이 결국 한국인의 의지로 해체·재구성된 과정은, 식민지 유산을 둘러싼 동아시아 역사 인식의 차이와 함께, 피해국이 주체적으로 기억을 설계해 나가는 한 사례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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