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위기 상황을 반도체·모바일·리더십 측면에서 진단합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압도적 우위를 지켜온 메모리반도체는 인공지능(AI) 출현과 함께 후발주자인 SK하이닉스에 고대역폭메모리(HBM) 1등 자리를 내주며 고전하고 있다. 한때 대만 TSMC를 위협했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은 선단공정으로 넘어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며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HBM서 승승장구 SK하이닉스, 고민 깊은 삼성전자

삼성전자는 메모리 사업에서 수년간 세계 선두 업체로 자리매김해왔지만, HBM 시장에서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AI와 고성능컴퓨팅(HPC)의 폭발적 성장으로 HBM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시장 내에서 삼성전자의 존재감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마이크론에 비해서도 떨어진다.
일각에서 제기된 AI 거품론에도 불구하고 내년 HBM 시장은 전년 대비 대폭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의 메모리반도체 제조사 마이크론은 내년 HBM 시장 규모가 250억달러(약 33조원)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2023년의 40억달러(약 5조3000억원) 수준에서 연평균 150%씩 성장하는 셈이다. 시장에서는 내년 시장 규모가 마이크론의 전망치를 웃도는 400억달러(약 52조8000억원), 용량으로는 200Gb(기가비트) 규모까지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AI 반도체 생산을 제약했던 TSMC의 칩온웨이퍼온서브스트레이트(CoWoS) 생산능력이 내년에는 올해의 2배 이상으로 증폭되며 공급여력이 크게 확대되고, 추론용 AI 반도체 수요도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AI 반도체의 대당 HBM 탑재량이 증가하고, 메모리반도체 제조사들이 엔비디아 외의 고객사를 유치하며 공급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내년에도 HBM 수요 대부분을 SK하이닉스가 독식하는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2022년 6월 세계 최초로 HBM3(4세대)를 양산한 후 시장지배력을 강화해왔다. 특히 HBM 수요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엔비디아에 사실상 독점 납품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IBK투자증권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올해 HBM 출하량은 60억Gb로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의 HBM 소요량인 70억Gb의 85%를 차지한다. SK하이닉스는 내년 공급물량을 120억Gb 수준으로 확대해 엔비디아 외에 브로드컴이나 아마존웹서비스(AWS) 등 신규 고객의 물량까지 흡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배력을 강화하는 SK하이닉스뿐 아니라 D램 업계 3위인 마이크론 역시 HBM 시장 내 존재감 확대를 노리면서 삼성전자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당장 올 3분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와 SK하이닉스 간 영업이익 격차가 1조원 이상으로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삼성전자는 HBM3E(5세대) 8단 개발을 완료했으나, 아직 엔비디아의 품질인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애초 엔비디아의 신규 AI 반도체 출시에 맞춰 올 2분기 말 납품을 기대했지만, 4분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공급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올 7월 말 열린 2분기 실적설명회에서 올 하반기 HBM 매출이 상반기보다 3.5배 이상 확대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HBM3E의 성과가 가시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D램 선단공정 경쟁력도 흔들리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에 앞서 차세대 D램 공정 개발에 성공하면서다. SK하이닉스는 올 8월 세계 최초로 10㎚(나노미터) 6세대(1c) 기반 더블데이터레이트(DDR)5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D램은 10㎚대부터 미세공정을 세대로 구분해 1c는 약 11㎚ 수준의 미세공정이 적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반도체의 집적도가 향상되며 한 웨이퍼에서 더 많은 칩을 생산해 원가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삼성전자는 통상 SK하이닉스, 마이크론에 비해 메모리 선단공정 영역에서 압도적 우위를 지켜왔지만, 점차 경쟁사의 추격을 허용하며 현재는 격차가 크게 좁혀진 상황이다.
선단공정으로 전환되면 생산에 투입되는 공정 단계가 늘어, 그만큼 수율을 높이기도 힘들어진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의 개발 기회를 SK하이닉스에 내준 만큼 안정적인 양산, 공급으로 경쟁력을 증명하는 데 힘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로드맵 흔들리자 삼성 파운드리 발길 끊는 고객들

파운드리사업부는 TSMC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야심 차게 선단공정 개발에 힘을 실었지만, 주문량이 저조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2년 6월 TSMC에 앞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적용한 3㎚ 공정 양산을 시작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주요 팹리스(반도체설계회사) 고객 유치에 실패하며 고민이 깊어졌다.
파운드리는 팹리스 고객이 제조를 의뢰한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생산해 매출을 올린다. 선단공정을 도입해 반도체의 성능을 높이고, 고객이 요청한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데서 경쟁력이 결정된다. 삼성전자는 TSMC를 추격하기 위해 빠르게 선단공정의 기술력을 높였지만, 이 과정에서 생산 수율에 타격을 받아 신뢰도가 하락했다.
2022년 발생한 게임최적화서비스(GOS) 사태가 결정적이었다. '갤럭시 S22' 시리즈에 탑재된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엑시노스 2200'에서 성능저하와 발열 문제가 보고됐다. 엑시노스 2200은 시스템LSI사업부가 설계하고 삼성전자 파운드리 4㎚ 공정(SF4E)으로 제작됐다. 최첨단 공정을 쓰기 때문에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의 가늠자로 평가된다. 이 제품이 성능 논란을 겪으면서 파운드리 양산 기술을 둘러싸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후 후속작인 '엑시노스 2300'은 공개조차 되지 못했다. 올해 초 '엑시노스 2400'으로 부활에 성공하나 했지만, 내년에 선보일 '엑시노스 2500'은 '갤럭시 S25' 시리즈 적용 여부가 불투명해지며 여전히 불안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엑시노스 2500의 내년 초 공급이 최종 무산된다면 연내 양산 예정이었던 3㎚ 기반의 'SF3'는 고객사 공백으로 일정이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내부 고객인 모바일경험(MX)사업부도 외면하는 상황에서 퀄컴을 비롯한 외부 고객 유치는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의 투자계획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선단공정 도입을 위한 장비 매입과 생산 공장 건설로 투자 부담이 확대되는 반면, 매출을 올릴 대형 고객사를 확보하기 어려워지면서 D램에 우선순위가 밀리는 흐름이다.
국내 평택 제4공장(P4)은 D램 위주로 설비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당초 계획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생산설비가 함께 들어서는 복합 공장이었으나, 파운드리의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D램 생산능력을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조정에 나선 것이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파운드리 공장은 이미 한 차례 가동시점을 기존 2024년 하반기에서 오는 2026년으로 연기했다. 삼성전자는 공장(셸)을 미리 건설해 갑작스러운 수요 확대에 보다 탄력적으로 대응한다는 '셸퍼스트' 전략을 추진해왔지만 선단공정에서 대형 수주 공백으로 감가상각비 등 고정비 부담이 커지자 속도조절에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2㎚ 공정 양산에 돌입한다. 일본 프리퍼드네트웍스로부터 AI 반도체 수주를 따내는 등 초반 흐름은 긍정적이다. 2㎚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선단공정 성과를 좌우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번에야말로 의미 있는 성과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파운드리 선단공정 경쟁이 2㎚에 이어 1㎚ 수준까지 진입하는 시점에는 투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고객사는 높은 위탁생산 비용에도 첨단 반도체가 필요한 소수 팹리스로 좁혀진다"며 "1등을 노리는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반전을 노릴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진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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