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치매환자 백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안지연 청주시 상당보건소 건강증진과 주무관 2025. 11. 1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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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외할머니는 참 강한 분이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고, 교회 권사로서 새벽이면 성경을 품에 안고 조용히 기도하러 나가시곤 했다. 인생의 크고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기도로 마음을 다잡으시며 담담하게 견뎌내셨고, 말없이 가족을 살피며 언제나 스스로의 힘으로 버텨내셨다. 평생을 신앙과 근면으로 묵묵히 삶을 일구어오신, 그런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일에도 교회에 갈 준비를 하지 않으시고, 좋아하던 찬송가의 가사도 기억하지 못했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아오신 분이, 가장 믿던 이름조차 점점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아프게 다가왔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치매 진단이 내려졌고, 병은 조용히, 그러나 무섭게 일상을 잠식해갔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이 병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걸까. 나를 못 알아볼까 봐 조마조마했던 날들, 엉뚱한 말로 화를 내시던 순간들, 그리고 결국,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잊어버린 그날. 그 모든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렇게 할머니는 신앙도, 기억도, 말도 하나둘씩 흐릿한 채로 우리 곁에서 조금씩 멀어지셨다.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보였다. 치매는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함께 겪는 긴 여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도 깨닫게 됐다.

지금 우리는 치매 환자 백만 명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안에는 할머니 같은 분들이 있고, 그들을 돌보는 수많은 가족이 있다.
치매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내 부모, 내 형제, 아니면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치매를 '숨겨야 하는 병'처럼 여긴다. 치매에 걸리면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편견, 민폐를 끼친다는 시선이 사회 곳곳에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치매 환자 가족들은 병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두렵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 하지만 그런 마음이 모이면, 사회는 점점 무심해진다. 그 반대는 어떨까. "나 하나만이라도"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조금 더 다가서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치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말 한마디를 건네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날 때, 이 사회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길에서 헤매는 어르신을 한 번 더 눈여겨보는 일, 치매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친구에게 전달하는 일, 동네 경로당이나 복지관에 관심을 갖는 일. 길을 잃은 어르신에게 "괜찮으세요?" 하고 말을 걸 수 있는 용기. 이 작은 관심과 행동이 모인다면 누구든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결코 먼 미래가 아니다.

이제는 치매를 두려워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치매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치매가 있어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공감하고, 기억하고, 외면하지 않는 것. 그 작은 실천이 모여 진짜 변화를 만든다. 치매 환자 백만 시대. 숫자만큼 무겁고 큰 책임감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태도. 그것이 치매 걱정 없는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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