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남편이 얼차려 시키더라"...20년 성악 포기하고 아나운서 된 서울대생 근황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의 '전화위복'은 엄청난 행운처럼 보이지만 사실 당사자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나에게 찾아온 고난에 좌절하고 절망만 하기보다는 그와 다른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지요.
오랜 시간 열정을 쏟은 자신의 분야에서 두 차례나 고배를 마시고 뒤늦게 '배우'라는 길에 들어서서 인정받고 있는 여배우가 있습니다. IMF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유산이라는 가슴 시린 경험까지 쉽지 않은 인생 역경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다는 주인공은 배우 김혜은입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김혜은은 4살부터 음악을 시작했고 스스로 "프리마돈나가 꿈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성악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덕분에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했고 3학년 무렵 미국 줄리아드 음대로 연수를 떠났지요. 다만 연수를 가보니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인재들 사이에서 기가 죽었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평가했을 때 '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는 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시기는 IMF로 집안 사정도 어려워진 때라 학비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서울대 성악과 졸업생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방식을 따르자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년에 10억 가까운 학비가 드는 상황. 그렇다 보니 김혜은은 '동생도 둘이나 있는데 장녀인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클래식으로 10억을 다시 벌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결국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20년 동안 꿈꾸던 분야를 포기하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요? 오히려 너무 열심히 최선을 다해왔기에 포기가 쉬웠다는 김혜은은 졸업 후 복식호흡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를 보면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 아나운서 시험에 도전했습니다. 93학번인 김혜은이 청주 MBC 아나운서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 1997년이니 음악을 포기하고 아나운서로 방향을 전환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은 셈.
이후 서울에 올라와서는 MBC 간판 기상 캐스터로 활약했는데, 당시 기상방송이 기존의 색을 벗고 보다 활력 있는 콘셉트로 전환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던 시기여서 김혜은은 유난히 힘든 촬영을 도맡았습니다. 단풍 드는 시기에 맞춰 하이힐을 신고 북한산 정상까지 등반하기도 했고 강원도에 폭설이 내리면 몇 시간 동안 눈 속에 파묻혀서 촬영해야 했지요.
기상 캐스터로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준 건 현재의 남편. 기상 캐스터로 가장 바쁘던 시기에 김혜은은 미용실 디자이너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과 처음 만났습니다. 첫눈에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반했다는 남편 김인수 씨와 달리 김혜은은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6살 연상 치과의사 소개팅남에게 큰 호감이 없었지요.
하지만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고민하는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요. 혼담이 오가던 중 예비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한 날 김혜은은 갑자기 "결혼을 못 하겠다"라며 혼란스러운 심경을 털어놓았고 이에 김인수 씨는 눈물을 흘리며 차도로 비틀비틀 걸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김혜은은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걱정이 돼서 잽싸게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지요.
한바탕 소동 끝에 2001년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소위 '주도권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나라 농기구의 대부분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세아텍'의 대표인 故 김웅길 회장의 아들이기도 한 김혜은의 남편은 삼형제 중 장남으로 동생들에게 얼차려를 주던 습관을 아내에게까지 이어갔습니다. 실제로 김혜은은 결혼 후 남편이 '차렷, 열중 쉬어'를 시켰다며 10년간 순종적으로 살았다고 전했습니다.
집에서는 남편에게 얼차려를 당할 정도로 순종적으로 지내고 시댁에서는 매년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갈치 김치를 80포기씩 담그면서 또 방송국에서는 기상 캐스터로 활동하는 삶이 힘들지 않다면 더 이상했겠지요. 결국 김혜은은 유산의 아픔을 겪고 스트레스성 난청으로 한쪽 귀가 안 들릴 정도의 상황에서 2004년 겨울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김혜은에게는 성악에 이어 두 번째로 포기하게 된 직업인 셈인데요. 다행히 퇴사 후 7개월 만에 기다리던 임신에 성공했고 출산 후에는 '연기'라는 새로운 길에 뛰어들어 그야말로 전화위복을 맞게 되었습니다. 앞서 김혜은은 퇴사 직전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극중 기상캐스터 역할로 특별출연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김혜은의 연기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덕분에 출연 분량이 6회로 늘어났지요.
그리고 출산 후 드라마 '아현동마님'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김혜은은 경상도 출신이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광주대학교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해서 4개월 동안 기숙사에 머물면서 학교수업을 듣고 기숙사의 여대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사투리를 익혔습니다.
다른 길을 돌아 조금 늦게 도착한 베우의 길에서 김혜은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한 열정으로 연기에 임했고 2012년 드디어 인생작으로 불리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만나면서 배우로서 확실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극중 '여사장' 그 자체로 보이는 완벽한 연기를 해내면서 이전까지 '서울대 성악 전공, 아나운서 출신, 의사남편' 등 김혜은을 맴돌던 각종 수식어들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배우 김혜은'을 각인시켰지요.
당시 김혜은은 작품 속 술집 마담 역을 소화하기 위해 실제로 8개월 동안 담배를 직접 피우기도 했는데요. 원래는 흡연하지 않았다는 김혜은은 "어설프게 보이기 싫어서 매일 라이터, 성냥 불 켜고 끄는 연습, 담배를 피우는 손가락 각도, 속담배 피우는 법까지 열심히 했다"면서 "연기를 위해 배운 담배에 지배당했다"라고 전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회식을 하거나 술을 마시면 담배를 찾게 된 것인데, 그러던 중 배우 조진웅에게 "진웅아, 담배"라고 말했더니 "누나, 그만. 지금 피우면 평생 피워야 해"라며 말린 것을 계기로 무서운 마음이 들어 그만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김혜은은 촬영 중에 조진웅 덕분에 몰입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내연녀로 나오는 김혜은이 감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촬영 직전에 손깍지를 잡는 등 설레는 행동을 했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 김혜은은 "조진웅이 연출 전공이라 상대 배우가 좀 안 풀린다 싶으면 끌어내 주고 싶어 한다. 뭘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느끼게 해준다"라며 배려에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이렇듯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촬영하면서 배우로서 자신과 다른 인물에 몰입하는 경험을 한 김혜은은 실제 생활에서도 평소의 순종적이고 억압적이던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엄격한 부모님 아래에서, 결혼 후에는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맞춰 살아오던 삶을 벗어나고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갑자기 직설적이고 대담하게 변한 아내의 모습을 보고 놀란 남편은 "사기결혼이다. 배우였으면 결혼 안 했다"라며 이혼을 요구할 정도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차츰 아내를 이해해갔고 현재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김혜은은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면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한편 김혜은은 인터뷰를 통해 "연기와 방송을 좋아하는 건 시청자와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방송계에서 권력자는 시청자다. 그게 편하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요. 20년 동안 열정을 쏟아부은 성악과 8년 동안 성실히 일한 기상캐스터 생활을 정리할 때의 마음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그때의 열정과 경험이 있었기에 현재 배우 김혜은의 모습이 완성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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