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헌법 개정, 허를 찔렸습니다” KBS 기자의 반성문…예측 왜 틀렸나? [뒷北뉴스]

고은희 2024. 10. 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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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북한 관련 소식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는 [뒷北뉴스]를 연재합니다. 한주 가장 화제가 됐던 북한 관련 소식을 '앞면'이 아닌 '뒷면', 즉 이면까지 들여다 봄으로써 북한발 보도의 숨은 의도를 짚고, 쏟아지는 북한 뉴스를 팩트체크해 보다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의심, 또 의심해야 했습니다. '최고인민회의'를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국회 격인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7일 소집됐는데, 이번 회의에서는 헌법을 개정해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명문화하고, 통일 표현을 삭제하는 대신 새로운 국경선을 포함한 영토 조항이 신설될 거로 관측됐습니다. 이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월에 주문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북한은 남한 언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존에 예상됐던 사항은 그 어떤 것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헌법 개정 내용을 살펴보면, 노동 연령과 선거 연령 수정이 반영됐을 뿐입니다. 12년 의무 교육에 따라 기존 노동 연령과 선거 연령을 기존 16살과 17살에서 각각 1살씩 상향 조정했을 거로 추정됩니다.

이 같은 최고인민회의 결과를 다룬 북한 매체의 보도를 보고 허탈함마저 느껴졌습니다. 북한 헌법 전문을 뒤지면서 '통일'과 관련된 조항을 눈이 빠지게 찾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남북 관계와 관련된 헌법을 개정하고 난 뒤에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시간들이 참 덧없이 느껴졌습니다.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고 모든 사전 취재와 분석, 예단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북한의 발표를 뜯어보기로 했습니다.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된 7일, 김정은 위원장이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방문했다.


질문1. 북한은 남북 관계 관련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것인가?

북한을 취재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직접 취재가 불가하다는 점입니다. 북한은 대표적인 '극장 국가'이기 때문에 공식 발표마저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은 '노동 연령과 선거 연령 헌법을 개정했다'고 발표했지만, 이게 곧 '남북 관계 관련 헌법 개정은 하지 않았다'고 곧바로 해석해선 곤란하단 겁니다.

전문가들의 해석은 대체로 '남북 관계 관련 헌법은 개정하지 않았다'는 쪽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중요한 내용의 헌법을 개정하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에 과연 불참했을까 하는 점이 꼽힙니다.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된 7일, 김 위원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방문했습니다. 심지어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도 최고인민회의 진행 도중 신형 240mm 방사포의 성능을 검증하는 시험 사격장을 찾았습니다.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북한이 관련 헌법을 개정해 놓고도, 이런 사실을 감춰뒀다가 나중에 발표한 사례도 있단 겁니다. 실제, 북한은 2019년 4월 김정은을 국무위원장으로 재추대하면서 공식 국가수반으로도 추대하는 내용을 담아 헌법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은 석 달이 지난 뒤에야 대외 선전매체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북한이 개정된 헌법의 상세한 내용은 뒤늦게 공개하기 때문에 실제 헌법을 개정했는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런 분석에도 재반론이 가능합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은 중요 개헌을 단행하면 조문이 추후 공개되더라도 보고자의 상세한 설명으로 개헌 내용을 노동신문 보도로 주민에 공개했다"며 "통일 표현 삭제와 영토 조항 신설 같은 중요 개헌을 하고도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은 작다"고 평가했습니다.

2019년 4월의 헌법 개정 사례도 당시에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밝혀졌지만, 대략적인 추정은 가능한 내용이 함께 발표된 바 있습니다. 헌법상 국가수반이었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최룡해를 발탁하면서 동시에 국무위원회 제1 부위원장으로도 선임했는데, 이로써 국가수반의 역할이 1인자인 국무위원장으로 넘어갔을 거로 예상됐습니다. 지금처럼 아예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는데, 뒤늦게 중요한 내용의 헌법 개정을 했다고 발표할 가능성은 낮다는 겁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불참한 채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됐다.


질문2. 북한이 만약 헌법 개정을 하지 않았다면, 왜 그랬을까?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취재 기자에게 더욱 난감한 과제입니다. 정부와 기관, 전문가의 분석을 빌려 최대한 빈약한 상상력의 틈을 메워야 합니다.

취재를 종합해 보면, 남북 관계 관련 헌법 개정은 김 위원장의 지시였는데도 이번에 이행되지 않은 것이라면 이 역시나 당연히 김 위원장의 의중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의중의 핵심은 이게 '활용하기 좋은 카드'라는 점입니다. 남한을 '제1 적대국'으로 규정하면서 주민들에게 '이게 다 남한 탓'이라며 뭐든 책임을 돌릴 수 있고, 새 국경선을 설정하면서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면 미국까지 포함된 협상의 장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카드를 미국 대선 판세도 나오지 않은 지금 시점에 사용하는 건 너무 아깝다는 판단을 김 위원장이 했을 수 있습니다.

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가 열리는 날 국방대학을 찾아가 연설을 하면서 남한을 겨냥해 "의식하는 것조차도 소름이 끼치고, 그 인간들과는 마주서고 싶지도 않다"고 강도높은 비난을 쏟아낸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두 국가론'을 포함한 헌법 개정을 통해 대남 적개심을 고취하거나, 남북 간 긴장 수위를 끌어올리는 대신 공개 연설로 갈음했단 겁니다.

그럼에도, 이번 최고인민회의가 이틀간 열렸는데, 노동과 선거 연령을 고치는 정도로 이토록 시간을 끌 리 없다며 더 중요한 내용의 헌법을 개정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심지어 이번 최고인민회의는 김정은 지시 이후 9달 만에 열리는 것이어서 이미 사전 논의의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9달이란 시간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반박도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내부적으로 '통일 지우기'에 나서긴 했지만, 주민들의 공감대를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단 겁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한반도전략센터장은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번 헌법 개정의 주된 관심사였던 '새로운 국경선 설정' 문제가 발목을 잡았을 것이란 분석입니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남쪽의 국경선을 설정하려면 정전협정에 기초한 군사분계선을 우선 인정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겁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당 창건 79주년 기념 공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질문3. 헌법을 개정했다면 언제 발표할까? 개정하지 않았다면 대체 언제쯤?

이제 남은 건 언제쯤 이 카드를 김 위원장이 흔들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헌법 개정 여부가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발표를 언제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헌법을 개정했다면 그 내용을 언제 발표할지, 개정하지 않았다면 언제 개정하고 그 사실을 밝힐지, 이것이 초점입니다.

가장 유력한 건 '미국 대선'을 상수에 넣고 계산을 해보는 겁니다. 김 위원장에게는 트럼프든, 해리스든 누군가와는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테니 말입니다. 변수로는 내부 경제 상황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관계 등이 꼽힙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영토 조항과 통일 삭제 등 두 국가론 헌법화는 남북관계뿐 아니라 주변 강국과 관계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서둘러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미국 대선 결과를 고려하고 이후 정치적으로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15기 최고인민회의 구성 후로 '두 국가론' 개헌 시기를 조절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습니다.

김 위원장이 노동당 창건 79주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문을 뜯어봐도 당분간 남북 관계보다는 내부 문제에 집중할 거로 전망됩니다. 김 위원장은 이례적으로 '김정은' 이름 석 자를 걸고 북한 대내외 매체 담화문을 냈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통치 이념인 '인민대중제일주의' 실현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면서 당 간부들을 겨냥해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 축재 행위를 뿌리뽑기 위한 투쟁을 계속 강도높이 벌려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강 잡기에 나섰습니다.

양무진 총장은 김 위원장의 담화에 대해 "최근 지방 발전, 수해 복구 등에서 나타난 당 간부와 일꾼들의 기강 해이, 복지부동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며 "당 기강 잡기를 통해 체제 결속 극대화를 시도"한다고 분석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처럼 내부 현안 해결에 당분간 주력하는 사이 남북 간 긴장 국면을 극대화할 여지가 높은 헌법 개정이나, 혹은 개정 내용 발표는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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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희 기자 (ging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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