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럭셔리 그랜저'가 K7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사이, 다섯 번째 그랜저 'HG'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실 정식 차명은 '5G 그랜저'였지만, XG 이후 프로젝트명으로 구분하는 게 워낙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후 등장한 신형 모델들도 다 그렇게 불렀죠. 세대 구분이 명확하기도 하고요.

2011년 1월에 출시된 그랜저 HG는 업계를 충격에 빠뜨린 'YF 소나타' 못지않게 파격적인 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그랜저'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왔지만, 할아버지, 아빠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던 이전 모델들과 달리 결혼도 안 한 막내 삼촌이 떠오르는 차가 됐죠.

'그랜드 글라이드', 위대한 활공을 주제로 했다는 외관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플랫폼을 공유하는 쏘나타와 비슷한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더 커진 차체에서 오는 덩어리감과 특유의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그랜저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K7이 '호랑이'라면 이쪽은 '독수리'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크기를 한껏 키운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 특히 헤드램프를 타고 올라가는 LED 포지셔닝 눈썹은 K7의 호랑이 눈썹 못지않게 강렬했어요.

18인치 대구경 휠이 시선을 사로잡는 측면은 매끄럽게 떨어지는 루프라인, 사선으로 치켜 올라간 캐릭터 라인으로 전면부의 스포티한 인상을 그대로 이었습니다.
'TG'에서 이어진 리어휀더의 볼륨은 헤드램프에서 뻗은 크롬 라인에 웨이브를 만들어 강조했고, 마치 조각칼로 파낸 듯 굵은 음각을 넣어 또 한 번 강조했는데, 자칫 둔해 보일 수 있는 후면부에 무게감을 덜어내면서 차를 더욱 날렵해 보이도록 유도했죠. 현대차의 농익은 금형 기술이 돋보이는 디테일이었어요.

후면부도 강렬했습니다. 날개를 펼친 듯 좌우로 이어진 LED 리어램프로 누가 봐도 그랜저임을 알 수 있게 했고, 매립형 머플러를 더해 깔끔하게 마무리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몰딩 없이도 화려했고, 직전 모델과 비슷한 램프 구성으로 눈부심도 덜해졌죠.

파격은 실내에도 이어졌습니다. 거대한 'Y'자를 이루는 대시보드, 입체감이 돋보이는 크래쉬 패드 디자인은 지금 봐도 독특한 구성이죠. 앞서 선보인 쏘나타, 아반떼와 패밀리룩을 이루면서도 차급에 걸맞게 화려했고 갈라진 틈에는 푸른색의 간접 조명까지 넣어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스웨이드 천장 마감과 '나파 가죽시트', 금속 장식과 어두운 색상의 우드그레인을 적절하게 배치해 고급감과 도시적인 느낌을 동시에 챙긴 것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죠.

이밖에 '오토 홀드'가 포함된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 3단계로 조절되는 앞좌석 열선 및 통풍 시트, 차간 거리를 스스로 조절해 주는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첨단 편의장비를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세로 자리 잡은 '파노라마 선루프'를 추가해 개방감을 높인 것은 물론, 그랜저 TG에 비해 휠 베이스가 65mm나 길어지면서 공간만큼 에쿠스도 부럽지 않았어요. 또 사치스러운 '뒷좌석 전동 리클라이닝'은 빠졌지만, 이번엔 측면 커튼을 추가해 여전히 쾌적했죠.

다만 탑승객이 푹 둘러싸여 있는 걸 의도했는지, 센터페시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전방 시야가 좀 답답했습니다.
도어 트림에는 벤츠를 모방한 '시트 조절 스위치'를 마련했는데, 이게 보기에는 좋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트를 조작할 때마다 팔을 쭉 뻗어야 하는 등 어정쩡한 자세가 연출됐어요. 등받이를 조작하려면 시트에서 등을 떼어야 했습니다.

보닛 아래의 변화도 상당했는데요. GDi 기술을 적용하면서 전작의 MPI 엔진을 상회하는 강력한 출력과 뛰어난 연비,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습니다. 주력을 '4기통 2.4L 엔진'으로 설정했고, 상위 모델 역시 3.0L로 낮춰 배기량이 줄면서 세금도 함께 줄었죠.
기존 유압식 스티어링 시스템을 전자식으로 변경했고, 전륜 서스펜션은 전작의 더블 위시본에서 맥퍼슨 스트럿으로 교체됐습니다. 그랜저다운 정숙성과 편안 한 승차감을 여전히 만족스러웠지만, 고속으로 갈수록 붕뜨는 듯한 특유의 가벼움은 해결되지 않았죠.

얼마 뒤에는 수출형 3.3L GDi 엔진을 얹은 '셀러브리티'라는 최상위 트림을 출시해 넉넉한 성능을 원했던 소비자들에게 어필했고, 수입차와 경쟁차의 3.5L 모델에 대응했습니다. 전용 19인치 휠과 전용 그릴, 블랙 베젤 헤드램프로 치장했고, '어라운드 뷰 모니터', '차선이탈 경고장치'까지 갖춰 꽤나 성의 있게 구성했죠.

2013년부터는 한 차례 부분 변경을 통해 전작과 마찬가지로 그릴과 휠 디자인 등 소소한 디테일을 개선해 신선함을 더했고, 어라운드 뷰 등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편의사양을 하위 트림에도 확대 적용했습니다. 셀러브리티에는 전자제어 서스펜션이 부활했어요.
가장 돋보인 건 그랜저 최초로 하이브리드 모델이 추가됐다는 점인데요. 수출용 '쏘나타 하이브리드'에 적용된 2.4L 쎄타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탑재해 리터당 16km라는 준수한 연비를 내세웠고, 당시 높은 인기를 끌던 수입 디젤 세단과 '캠리 하이브리드'를 정조준했습니다.

하이브리드임을 티 내기 바빴던 쏘나타와 달리 전용 휠과 하이브리드 레터링, 전용 컬러를 제외하면 외관상 차이는 없었고 실내에는 화사한 아이보리 시트로 산뜻함을 더했죠.
물론 대중적으로 하이브리드의 인기가 높지 않았고, 현대차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완성도 또한 높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불티나게 팔리는 않았지만, 수입차에 대한 거부감이나 대형차 유지비에 부담을 느끼던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아 소소한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바로 1년 뒤 2014년에 한 번 더 부분 변경을 거쳤는데, 이번엔 변화의 폭을 넓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블랙 베젤 헤드램프와 LED 안개등을 더한 범퍼, 머플러 팁에 엣지를 더하는 등 더욱 스포티해진 외관으로 그랜저 눈독 들이던 젊은 소비자를 공략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과하다 싶었는데, 흰색에 18인치 휠, 선루프가 들어간 차는 지금 봐도 참 세련됐더라고요.
실내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저렴한 가격의 순정 내비게이션과 '카드 타입 스마트키', '후측방 경고', 스마트폰으로 원격시동, 공조 장치 조작 등이 가능한 최신 텔레매틱스 시스템 '블루링크' 등 여러 첨단 편의사양을 새롭게 추가하면서 상품성을 크게 개선했습니다.

또 하이브리드에 이어 '2.2L R 엔진'을 얹은 디젤 모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죠. 유럽 수입차를 중심으로 디젤 세단의 거부감이 상당수 해소됐고, 디젤 엔진의 두터운 토크감과 뛰어난 연비가 돋보이면서 중-장거리를 주로 운행하는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덕분에 가솔린과 디젤, LPG에 하이브리드까지 선택할 수 있는 파워트레인만 무려 5가지나 됐어요.
3.3L 엔진은 이 무렵 어떤 맹수한테 빼앗기면서 단종되었습니다. 이밖에 수입차 대중화로 높아진 소비자 입맛에 맞춰 서스펜션 세팅도 개선되면서 과한 출렁임을 억제하고, 더욱 안정적인 코너링 실력을 제공했죠.

전작이 중년부부가 고등학생 자녀와 타고 다닐 법한 차였다면 5세대 그랜저는 신혼부부가 카시트를 설치하고 타도 어울리는 차였습니다. 흔히 기본기라고 부르는 주행 품질은 여전히 동급 수입차에 비해 아쉬웠지만, 현대차의 장기인 넉넉한 공간과 압도적인 편의장비로 보완했죠.
이름이 가진 무게감에 비해 지나치게 젊어진 디자인은 기존 고객인 중장년층 소비자가 이탈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역으로 젊은 고객을 상당수 끌어들이면서 다양한 연령대에서 인기를 끌어 도합 51만 대라는 역대급 판매량을 기록했어요.

한동안 국내 자동차 판매량 1~3위를 쏘나타, 그랜저, 아반떼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죠. 어느새 기본형이 3천만 원을 넘어설 정도로 비싸졌지만, 인기는 여전했는데요. 이 모델부터 무리해서 그랜저를 뽑는 젊은 소비자들이 많아졌고, K7과 함께 국산 '카푸어'의 대표 격 차량이 됩니다.

'2세대 아제라'로 투입된 해외시장 성적은 여전히 저조했습니다. 미드사이즈 시장에 비해 '라지 세단 시장'은 규모 자체가 크지 않은 데다가 관공서와 렌터카 등 '플릿 판매'가 주를 이루다 보니 그랜저뿐만 아니라 경쟁차인 아발론과 맥시마도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모델 이후 북미 수출을 중단하고 제네시스에 집중했죠.

한편 초기 연식의 경우 '매립형 머플러의 설계 결함'으로 고속 주행 시 배기가스가 실내로 유입되는 문제가 발생해 '가스랜져'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소비자의 건강과 직결된 부분이었지만, 리콜이 아닌 무상 수리로 대응해 많은 지적을 받았어요.

아시다시피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죠. 자신 있게 내세운 GDi 엔진이 말썽이었는데, 당시에는 GDi 엔진의 내구성 문제가 지금처럼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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