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그리고 지독한 연습 벌레
4할이 가까운데 자청해서 특타
이제 우리에게 친숙한 곳이다. 파드리스의 홈구장 펫코 파크다. 예전 이름은 다르다. 1990년대에는 잭 머피 스타디움으로 불렸다. 지역 신문(샌디에이고 유니온)에서 활동한 칼럼니스트의 이름을 붙였다. 새 구장 설립을 역설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곳에는 반려견 에이브와 함께 있는 동상으로 남아있다.
그 무렵이다. 정확하게는 1994년 여름이다. 애스트로스의 원정 경기 때다. 필 콜린스 감독의 기억이다.
“그날따라 경기장에 일찍 도착했어요. 홈팀 선수들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은 시간이죠. 그런데 누군가 그라운드에 있는 거예요. 땡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치고 있더라고요. 토니(그윈)였어요.”
지나가는 말로 물었죠. “’이 봐, 토니.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요즘 좀 별로라서요. 스윙이 영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우리들 모두 쓰러질 뻔했어요.”
기가 막혔던 이유가 있다. “그때 그 친구 타율이 얼마였는지 아세요? 거의 4할에 가까웠어요. 상대 팀이 모두 공포에 떨고 있을 때였죠. 그런데 자기 스윙이 마음에 안 든다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죠.”
물론 콜린스가 오해한 점도 있다. 그윈이 일찍 나와서 훈련하는 건 그날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하던 일이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특타(특별 타격훈련)다. 그에게는 매일의 일과일 뿐이다.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선수였다.
하루 종일 기계 볼과 씨름한 이방인
3년 전이다. 그러니까 2021년 봄이다. 낯선 아시아인이 펫코 파크로 왔다. 한국에서 온 내야수다.
존재감이 있을 리 없다. 덩치가 작고, 말도 안 통한다. 이방인일 뿐이다. 야구도 영 신통치 않다. 무엇보다 타격이 심각하다. 빠른 볼에 잔뜩 주눅 들었다. 하긴. 95~100마일짜리가 흔하고 널렸다. 타석에서 허둥대기 일쑤다.
포지션도 들쭉날쭉하다. 유격수-3루수-2루수.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나마 나가면 다행이다. 게임을 뛰지 못하는 날도 많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디서, 뭘 하는지. 찾는 사람도, 궁금한 사람도 없다.
그 무렵이다. 하나 둘 목격담이 들린다. 장소가 한결같다. 구장 한편의 실내 타격장이다. 혼자서 기계(피칭 머신)를 틀어 놓고, 씨름하는 모습이다. 그때부터다. 동료들이 그를 TP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토미 팸의 이니셜이다. 직전 시즌(2020년)에 잠깐 파드리스에서 뛴 내야수다. 그도 그렇게 기계 볼을 많이 쳤기 때문이다.
본인(김하성)의 말이다. “거의 케이지(실내 타격 훈련장)에서 살았어요. 어차피 야구도 못하는데, 빠따(배트)라도 치자. 맨날 머신을 100마일에 맞춰 놓고 하루 종일 쳤어요.”
그러다 보니 멀쩡할 날이 없다. 특히 손이 고생이다. 물집이 잡히고, 살이 벗겨지는 건 그나마 낫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울려 통증을 참기 힘들다. 결국 볼을 바꿨다. 단단한 야구공 대신 물렁물렁한 폼볼(foam ball)을 쓰기 시작했다. 본래 아이들 장난감용으로 개발된 것이다.
“그 공 덕을 많이 봤어요. 손이 안 아프고 (피칭 볼을) 오래 칠 수 있어요. 타석에 들어가서도 훨씬 편하더라고요. 빠른 볼이 확실히 잘 보여요. 스핀에도 익숙해지고요.”
암도 멈추지 못한 그윈의 열정
다시 토니 그윈의 얘기다.
은퇴(2001년) 후에 모교로 돌아갔다. 샌디에이고 주립대학(SDSU)의 코치(감독)를 맡았다. 그러던 중 암 진단을 받았다(2010년). 침샘에 생긴 종양이 악성으로 밝혀진 것이다. 제거 수술이 불가피했다.
후유증이 심각했다. 신경과 근육의 손상으로 웃는 표정을 짓지 못했다. 오른쪽 눈도 감기질 않았다. 잘 때는 테이프로 눈꺼풀을 붙여야 했다. 그런 식의 수술과 재발이 계속됐다. 어떤 때는 수술실에 12시간을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도 그의 열정을 멈추지 못했다. 아즈텍(SDSU 야구팀 이름) 전사들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됐다. 병원에서 곧장 학교 훈련장, 혹은 경기장으로 가는 일은 너무나 당연했다. 정신 차리기 힘든 화학 치료를 받으면서도, 덕아웃을 지켰다.
당시 아즈텍의 외야수였던 스펜서 손튼의 기억이다.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죠. 어떤 날은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했죠. 엄청난 통증을 혼자서 견뎌냈어요. 거의 끝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12년을 재임했다. 통산 363승을 올렸다. 뛰어난 제자도 키워냈다. 드래프트 시장을 뜨겁게 달군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다. 고교 시절에는 평범했던 투수였다. 그런데 그의 손을 거치며 엄청난 유망주가 됐다. 2009년 전체 1순위, 사상 최고의 계약금(1567만 달러, 현재 환율로 약 216억 원)을 받는 선수가 됐다.
메이저리그의 씹는담배 금지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파드리(Mr. Padre)’라고 불렀다. 20년을 한 팀에서만 뛰었다. 다른 곳에서 괜찮은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끝내 ‘원클럽맨’으로 남았다.
데뷔 첫 해를 제외하고 19년 연속 3할 타율을 찍었다. 은퇴 시즌에도 0.324를 쳤다.
타격왕만 8번을 차지했다. 나중에는 아예 (NL 타격 1위) 상 이름이 ‘토니 그윈 어워드’가 됐다.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평생 동안 한 번도 그를 KO(탈삼진)시키지 못했다.
글 앞에 콜린스가 목격했던 특타 장면. 자기 스윙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던 시기. 그해(1994년) 타율이 0.394였다. 테드 윌리엄스 이후 4할에 가장 근접한 기록이었다. 안타 3개 차이다.
2007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됐다.
그를 쓰러트린 것은 담배였다. 씹는담배를 야구만큼 사랑했다. 사인은 후두암이었다. 54세의 나이였다. (사후 유족들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의 조정으로 마무리됐다.)
샌디에이고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추모했다. 야구장 인근 고속도로를 ‘토니 그윈 프리웨이’라고 이름 지었다. 인접 도로를 ‘토니 그윈 드라이브’로 명명했다. 기념비적인 타율을 기리는 맥주도 출시됐다. ‘페일 에일 .394’라는 제품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메이저리그와 선수노조는 이후 단체 협약에 합의했다. 씹는담배를 그라운드에서 영구히 퇴출한다는 결의안이었다.
또 한 명의 연습 벌레
샌디에이고가 사랑하는 또 한 명의 타자가 있다. 그들을 연호하게 만드는 ‘어썸 킴’이다. 공교롭게도 그도 애연가다. 예전 동료 에릭 호스머가 팟캐스트에서 천기를 누설했다. 키득거리며 이렇게 얘기한다.
“이적 첫 해 클럽하우스 뒤 화장실에서 엄청 피우더라. 무초 스트레스(스트레스가 많아서) 때문에 끊지 못하겠다고 하더라.” (에릭 호스머의 Diggin' Deep Podcast 중에서)
역시 지독한 연습 벌레다. 하루 종일 실내 연습장에서 산다. 피칭 머신이 과열될 정도로 몰두한다. 그 덕에 스피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어제(9일)도 94.3마일(152㎞) 짜리 패스트볼을 가볍게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다. 올해만 벌써 9개째다. 그중 5개가 빠른 볼을 공략한 것이다.
매년 이맘 때면 파드리스 팬들이 숙연해진다. ‘미스터 파드리’가 떠난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현지 시간으로는 오는 일요일(한국시간 17일)이다. 올해가 그의 10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