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국가 방패’ 추앙, 한국은 특혜 시비
600조원 투자, 기업 자체 해결 절대 ‘불가’
투자 안전장치 확보를 ‘금산분리 위반’ 공격
‘SK 맞춤형’ 넘어 산업전반 규제 완화 필요
올해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2년 만에 대한민국을 추월할 전망입니다. 올해 우리나라 1인당 GDP는 3만7430달러로 대만의 3만8066달러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만은 내년에는 1인당 GDP가 4만 달러를 넘는다고 합니다. 성장률에서도 대만 정부는 올해 전망치를 기존 3.10%에서 4.45%로 대폭 상향 조정했고 내년에도 2.81%를 예상합니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은 올해 0.9%, 내년 1.8%로 대만에 크게 뒤집니다.
1인당 GDP와 성장률에서 우리나라와 대만의 격차가 벌어지는 데는 내수 부진, 인구 고령화, 원화 약세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대만은 TSMC를 정점으로 탄탄한 반도체 생태계가 조성돼 세계 파운드리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내는 게 결정적입니다.
미국, 중국, 일본, EU 등 글로벌 주요국들이 반도체 산업을 국가 안보와 경제 패권의 핵심으로 보고 특혜라고 할 정도의 파격 지원을 하지만 대만 정부의 TSMC에 대한 지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만은 TSMC를 단순한 기업이 아닌 ‘국가 안보의 방패’, ‘국가를 지키는 성산(聖山)’으로 인식하고 전폭적이고 신속한 지원을 합니다.
단적으로 대만은 2022년 대규모 가뭄 때 농업용수 공급 등은 제한하면서도 TSMC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물을 공급했습니다. 노사가 합의할 경우 하루 최장 12시간 근무를 가능하도록 했고 반도체 업계가 인력난을 호소하자 6개월마다 대학들이 반도체 전공 신입생을 뽑도록 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대만 정부는 애초 1987년 TSMC 설립 당시 자본금의 절반 정도를 직접 지원하며 핵심 기반을 다지도록 했습니다. 대만은 최근 10년간 진보 정권이 집권하고 있지만 기업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라면 뭐든 망설이지 않습니다.
진보 이재명 정부도 최근 역대 정권과는 다르게 반도체 산업 지원에 적극적입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국가 전략 사업 지원을 위해 반도체 특별법을 만들어 전력, 용수 등 산업 기반 시설 확충을 지원하고 보조금과 세제 혜택도 주기로 했습니다. 특히 기획재정부는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2050년까지 무려 600조 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를 앞두고 자금 조달 해법을 찾지 못해 고심해 온 SK그룹에 지주회사 관련 규제를 예외적으로 완화해 주기로 했습니다.
대만과 한국이 격차 확대되는 이유
기재부는 일반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의무 지분율을 기존 100%에서 50%로 낮추기로 했습니다. 일반 지주회사에는 금융과 산업의 경영 분리 원칙상 가능하지 않던 금융리스사 보유도 허용하기로 하고 내년 초 법안을 발의하기로 했습니다. 정부는 다만 특혜 논란을 의식해 지분율 규제 완화 대상이 되는 기업은 지방 투자가 연계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번 조치가 실행에 들어가면 SK그룹의 경우 SK하이닉스가 증손회사(반도체 공장 건설 및 임대 회사)를 설립할 때 100%가 아닌 50% 지분만으로 가능해지므로 국민성장펀드나 금융사 등으로부터 나머지 50% 미만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어 대규모 투자 자금 조달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SK하이닉스 반도체 지원책이 과연 실행에 들어갈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낙관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규제 완화의 열쇠를 쥔 공정거래위원회가 부정적입니다. 시민단체 등의 반발도 심해 국회 통과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SK그룹과 최태원 회장, SK하이닉스를 위한 맞춤형 특혜’라는 인식이 너무 팽배합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첨단산업 육성이라는 명분이 수십 년간 유지돼 온 금산분리와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공정거래법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제조업 기반의 대기업은 투자회사 설립을 통한 자금 조달보다 본업에 충실해야 하며, 기업이 번 돈을 재투자하거나 아니면 유상증자나 회사채 발행 등을 하면 되는데 왜 규제 완화로 푸느냐는 것입니다.
경실련이나 참여연대는 한 발 더 나갑니다. 이번 조치가 반도체 지원을 빌미로 재벌 총수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이며 일반 지주회사가 금융회사를 소유하게 되면 ‘금융의 사금고화’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시민단체들은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지분율 요건을 완화하면 총수 일가가 적은 자본으로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적 개악’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공정위·시민단체 반발, 지원 무산되나
공정위와 시민단체의 반대는 요약하면 SK든 삼성이든 반도체 투자에 필요한 자금은 번 돈을 재투자하든 금융시장에서 유상증자 등으로 조달하든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또 수십 년 지켜온 금산분리 원칙에 위배되며 오너 일가의 지배력 약화를 막기 위한 ‘꼼수’이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400조 원을 넘어 삼성전자에 이어 국내 2위입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40조 원 이상, 내년에는 80조 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증권사들은 전망합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팹 4기 건설에 소요되는 600조 원의 자금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안 되면 유상증자, 채권 발행, 대출 등으로 조달하라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기간에 걸쳐 조달하는 자금이라도 SK 스스로 해결하는 것은 현실성이 매우 낮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애초 극심한 경기 순환을 겪는 업종입니다. 지금은 AI 메모리(HBM) 수요 폭증으로 SK하이닉스의 경영 실적이 극적으로 개선됐지만 일시적 슈퍼사이클일 가능성이 큽니다. 앞으로 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지금처럼 수익을 내 600조 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SK 입장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하이닉스가 매년 50조~100조 원씩 이익을 내 여유 자금으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담보가 안 되기 때문에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자는 것입니다.
수십~수백조 원의 채권을 발행할 경우 예상되는 급격한 부채비율 상승과 신용등급 하락, 채권시장 혼란 등도 우려됩니다.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 조달은 더 비현실적입니다.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은 3000조 원대에 이르는 데 SK하이닉스의 시총은 400조 원 수준이어서 증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큽니다. 이런 현실에서 SK하이닉스가 거액의 유상증자를 단행할 경우 SK하이닉스 주가 폭락은 물론 증시 전체의 혼란이 불가피합니다. SK하이닉스 모기업인 SK스퀘어와 SK㈜의 부담도 커져 그룹 전체의 재무구조가 흔들릴 것입니다.
SK가 수백조원을 자본시장서 조달하면
SK와 SK하이닉스 특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번 SK 반도체 투자에 대한 지원이 금산분리 원칙을 깨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허점이 많습니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입니다. 이를 통해 산업자본의 부실이 금융으로 전이되거나 산업자본 총수가 금융회사를 자신의 사금고처럼 활용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이번 SK하이닉스 반도체 투자 지원책이 실행되더라도 SK그룹이 새로운 금융기관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특례 조치는 SK하이닉스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을 위한 SPC(특수목적회사)를 설립하고 해당 SPC가 정책 펀드 같은 외부 투자자를 유치하도록 한 것일 뿐입니다. 최태원 회장이 “SK는 금산분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AI 시대에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나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금산분리 차원이 아니다”라고 했던 점을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지켜온 금산분리 원칙을 40년이 넘은 지금도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하는지 의문이지만 금산분리 원칙은 10년 전 인터넷은행 설립을 허용하면서 이미 한 차례 깨졌다는 점도 참고해야 합니다.
대규모 반도체 투자를 위한 SK하이닉스에 대한 규제 완화가 최태원 회장 등 오너 일가의 지분 희석과 지배력 약화를 방지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도 본말이 전도된 설득력이 매우 떨어지는 주장입니다. 600조 원 반도체 투자와 관련해 SK가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것은 최태원 회장 개인의 지배력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주회사 체제가 가진 투자 제약 때문입니다.
일반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의무 지분율을 100%로 하는 기존 규칙은 SK하이닉스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을 위해 SPC를 설립할 때 어떤 형태의 외부 투자자도 참여하지 못하게 원천 봉쇄합니다. 지주회사 체제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대규모 투자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막는 역설적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게다가 오너 일가의 지배력 약화 문제 이전에 수백조 원을 유상증자로 조달하는 것은 주가 폭락과 기존 소액주주들의 반발, 경영진 배임 논란 등으로 애초 불가능합니다.
40년 넘은 ‘금산분리’ 금과옥조인가
정리하자면 600조 원에 이르는 SK하이닉스 반도체 투자에 대한 규제 완화 요구는 ‘천문학적인 투자 자금을 안정적으로 유치하는 구조’의 필요성이 핵심이고 본질입니다. 금산분리 원칙을 깼다느니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SK 오너 가문의 지배력 희석 방지를 위한 꼼수라는 주장 등은 한결같이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너무 한가한 얘기입니다. 백번 양보해도 부수적으로 그런 부분도 약간 우려된다는 정도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규제 완화가 행여라도 오너 일가의 사익이 아닌 국가 전략 산업 투자에만 엄격하게 사용되도록 감시하고 통제하면 그만입니다.
이번 지주회사 규제 완화가 SK만 혜택을 보는 ‘SK 맞춤형’이라는 비판이 부담스럽다면 앞으로 인공지능, 배터리, 미래차, 바이오 등에서 천문학적 투자가 요구되고 기업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과도한 수준이라는 판단이 서는 시점에서 규제 완화를 다른 산업, 다른 기업으로까지 확대하면 됩니다. 현시점에서 보면 지주회사 체제를 갖추고 배터리 사업 등에서 큰 투자가 필요한 LG그룹이 잠재 후보군이고, 필요하다면 LG에 대해서도 규제 완화 혜택을 주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SK하이닉스의 600조 원 반도체 투자를 위한 규제 완화를 비판하는 사람이나 단체라면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비판을 하기보다 외부 자금 유치의 핵심 구조인 증손회사(SPC) 모델 설계 단계부터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장치가 마련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챙기기를 바랍니다.
반도체 규제 완화 비판보다 중요한 일
예를 들면 SK 반도체 투자에 들어갈 국민성장펀드 같은 정책 펀드나 공적 자금은 선순위 채권자로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대신 모기업인 SK하이닉스는 먼저 손해를 감수하는 후순위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공적 펀드가 지분 투자로 참여하는 경우 상환 우선권이 있는 상환전환우선주(RCPS) 형태로 해 투자금 회수 가능성을 높여야 합니다. 장기 프로젝트의 위험을 선제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반도체 시장 전문가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독립적인 사업성 평가와 감시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업 실패 시 SPC의 자산을 어떻게 매각하고 투자금을 어떤 순서로 회수할지에 대한 출구 전략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미국, 중국, 대만, 일본, EU 등 글로벌 주요국들은 반도체 산업을 국가 안보와 경제 패권의 핵심으로 규정하고 특혜 이상의 파격 지원을 합니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은 반도체 특별법을 추진하면서도 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 예외 적용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런 와중에 낡아빠진 공정거래법 규제를 완화해 SK하이닉스 600조 원 반도체 투자에 숨통을 틔워 주려 하자 이번에는 금산분리 위반이니 오너가의 지배력 약화를 막기 위한 꼼수라느니 하는 한가한 얘기로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어디로 갈까요.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우리나라를 추월하는 데는 몇 년 걸릴까요. 자칫 우리 반도체 산업이 과거의 태양광이나 현재의 배터리처럼 위기를 맞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 봐야 합니다.

박종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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