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이야 아프겠지만… 오너 일가 책임 강화하는 세가지 열쇠

한정연 기자 2024. 10. 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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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이 상법 개정 미루면서
고려아연·영풍 등 분쟁 격화해
상법상 지배주주 특혜 따져봐야
지배주주 책임 법적으로 강화하면
승계 위한 위험한 선택 줄어들 것

# 재벌 총수와 같은 지배주주들에게 부여했던 특혜를 제한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이 늦춰지면서 지배주주 혹은 지배주주가 되려는 이들로 시장이 혼란하다. 상법에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지배주주의 신인의무, 업무집행지시자 직접 규제를 적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 당장이야 재벌 총수나 지배주주에게 '아픈 규제'일지 모르지만, 먼 미래를 봤을 땐 그들을 되레 돕는 제도들이다. 위험한 계획임을 알면서도 작은 자본으로 그 자본의 수백배에 해당하는 그룹을 통째로 승계하려는 유혹 자체를 법적으로 차단할 수 있어서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과 경영권 분쟁 중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사진=뉴시스]

#1. 고려아연 경영권 다툼에서는 자사주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영풍이 제기했던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금지 가처분 신청은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주식회사가 자기주식을 취득하는 것이 관련 법령에서 정하고 있는 절차 및 제한을 준수하는 한 특별히 위법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2. 두산그룹은 지난 7월 11일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두산밥캣을 인적 분할하고, 두산로보틱스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해 합병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캐시카우인 두산밥캣의 주식을 적자를 면치 못하는 두산로보틱스 주식과 1대 0.6317462의 비율로 교환하겠다고 밝히면서 불공정 논란이 일었다. 이복현 금감원장까지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냈지만, 두산그룹이 합병안을 철회하는 데는 무려 49일이 걸렸다.

#3. 한미약품의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는 창업자의 직계 가족들, 고향 후배가 이익에 따라서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10월 28일 임시주총을 앞두고, 한미약품이 독립경영을 선언하는 등 분쟁이 격화하고 있다.

■ 시장 혼란의 원인=정치권이 지배주주에게 부여했던 특혜를 제한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재계의 반대로 방치한 사이 시장은 매우 혼잡해졌다. 우리 경제는 1960~1970년대 수출을 무기로 발전하고, 그 이후에는 외환위기 등 대형 사건을 겪으면서 재벌 체제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주주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던 상법을 개정하는 것은 특별한 개혁이 아니다. 미뤄뒀던 숙제에 불과하다.

일례로 지금은 당당하게 경영권 방어책이라고 소개되는 자사주 취득의 경우 한국은 1992년 펀드를 통해서, 1994년부터는 상장사가 직접 총주식의 5% 이내에서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11년부터는 재계의 요청에 따라서 비상장사의 자사주 취득도 가능해졌다. 원래 목적은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가 부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사주 취득은 소각해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쓰이지 않았다. 자본시장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국내 상장기업의 자기주식 취득 및 처분 동기와 장기효과' 보고서는 기업 공시를 분석해 "2015~2022년 상반기 자사주를 직접 취득해 소각하겠다는 경우는 전체의 5.7%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5.7% 소각도 주가 부양이란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지배주주의 이사회 의결권을 확대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A기업 지배주주가 전체 주식의 45%인 4만5000주를 가지고 있다고 치자.

지배구조 개선은 한국경제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사진은 지배구조 개선 세미나에 참석한 이복현 금감원장. [사진=뉴시스]

A기업이 자사주 1만주를 취득해 소각한다면, 전체 주식 수가 10만주에서 9만주로 바뀌면서 A기업 지배주주의 지분율은 50%가 된다. A기업이 취득한 자사주를 지배주주에게 우호적인 B기업에 넘기면 더 큰 효과가 있다. A기업 지배주주는 우호지분을 포함해 55%의 이사회 의결권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지배주주가 의결권 강화를 위해 쓴 돈은 0원이다.

두산그룹이 추진했던 불공정한 합병비율은 어떨까. 지배주주가 고작 1~3%대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지금과 같은 재벌 체제를 만든 주범이 잦은 분할과 합병, 그리고 지배주주에게만 유리한 합병비율이었다. 자세한 설명도 필요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심 재판을 받는 혐의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불공정한 합병을 통한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이다.

이 회장의 최종 판결을 기다릴 것까지도 없다. 당시 국민연금에 압력을 넣었던 보건복지부 장관, 최종적으로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2022년 대법원 판결로 국민연금에 해를 끼친 혐의가 입증돼 각각 징역 2년 6월 유죄 선고가 확정됐다. 국민연금은 지난 9월 13일 이 회장 등을 상대로 5억1000만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 지배주주 책임 강화 3가지 열쇠=상법에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를 새로 넣고, 이름만 빌려준 이사의 종범 정도로 취급받던 업무집행지시자(총수)를 단독으로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을 넣으면 지금과 같은 시장의 혼란은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상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형법이나 특경법상 배임·횡령죄가 사실상 재벌 총수 등 지배주주의 불법행위를 규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2011~2021년 10년간 재벌 총수 일가 22명이 배임·횡령죄 혐의로 기소됐고, 그중 19명이 유죄였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는 경영진인 등기이사가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서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상법 제382조의 3을 개정하면 된다. 경영진이 회사에만 충실해야 한다면 지배주주의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지배주주가 경영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영진인 이사들이 소액주주들에게도 충실하도록 상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경영진이 소액주주들에게도 그 지분만큼의 비례적 이익, 혹은 모든 주주의 공정한 이익을 위해서 일하도록 규정하는 게 주주 충실의무다.

지배주주의 신인의무 조항도 신설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상법에는 지배주주를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조항이 없다.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은 지배주주의 신인의무(fiduciary duty)를 명시하고 있다. 서구권에서 지배주주를 형법상 배임죄로 처벌하지 않는 건 다른 법적 규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는 대주주가 소액주주에게 가져야 할 선관주의의무善管注意義務(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와 충실의무를 말한다. 지배주주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부당한 사익을 추구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상법 401조의 2에서 규정한 업무집행지시자는 재벌 기업에서라면 총수를 의미한다. 회사의 대표이사에게도 업무지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업무집행지시자이기 때문이다. 상법은 회사 이사에게 업무 집행을 지시하거나, 명예회장·회장·사장 등 회사의 업무를 집행할 권한이 있는 것으로 인정될 만한 명칭으로 업무를 수행하면 '업무집행지시자'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업무집행지시자의 처벌은 명확하지 않고, 회사나 다른 이사와 연대해서 그 책임을 지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지시에 따른 이사보다 업무지시를 한 지배주주의 처벌 수준이 더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업무집행지시자를 지배주주나 총수로 규정하고, 별도의 처벌 규정을 포함할 필요가 있다.

[사진=뉴시스]

■ 교도소 담장 위 걷는 지배주주들=정치권이 상법에 지배주주의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재벌 총수와 같은 지배주주들에게 대놓고 '교도소 담장 위를 걸으라'고 종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배주주들에게도 좋을 게 없다. 지금까지 재벌 총수 등 지배주주들은 상법의 허점 때문에 언제 유죄 판결을 받을지 모르는 위험한 계획임을 알면서도, 적은 자본으로 그 자본의 수백배에 해당하는 그룹을 통째로 승계받으라는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재계 이익단체들처럼 모든 규제를 악마화하는 것은 좋은 여론전이 아니다. 어떤 규제는 사회와 시장은 물론 특정한 상황에 놓인 지배주주들에게 보호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이익단체인 한경협(당시 전경련)은 2004년 '대규모 기업집단의 차별규제 현황과 개선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규제가 재벌을 차별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재벌의 계열사 채무보증을 제한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고, 내부거래를 제한하는 것은 기본권 제한이며, 출자한도를 제한하는 건 평등원칙과 직업선택 자유 침해다." 만약 이런 주장대로 해당 규제를 풀었다면 지금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됐을지를 생각해봐야 할 때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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