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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한진회장’ 이한진

조회수 2023. 3. 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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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계의 프로 n잡러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가 화려하게 보내온 2000년대 후반 왕조 시절, 그 구성원 모두가 빛나는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통산 1승 투수이자, 손끝 감각이 없는 희소병을 겪으며 희망의 끈이 끊겨버렸다던 선수, 이한진도 있다. 프로선수로서의 인생을 정리한 이후의 삶은 막막했지만 이게 웬걸. 경찰야구단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이제는 아카데미 대표와 유튜버, 블로거와 방송인을 겸업하는 ‘프로 n잡러’가 됐다. 인생에 야구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았지만 다른 모든 일도 결국 야구를 향하고 있다던 그. 선수로서의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여전히 많이 좋아한다는 이한진의 야구를 만나 봤다.

Photographer Inbi Na Editor Seohyeon Kim Location Dugout Magazine Studio

안녕하세요! <더그아웃 매거진>과 첫 만남입니다. 자기소개 부탁해요. (1월 6일 인터뷰)
안녕하세요. 지금은 야구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이한진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저는 요즘 아카데미에서 엘리트 선수들을 육성하고, 생활 체육 야구 선수들도 개인 지도도 하고 있어요. 또 다른 여러 가지도 준비하고 있고요.

#방송인 이한진

최근 종영한 방송 MBN ‘빽 투 더 그라운드’에 출연했어요. 제작진 측에서 출연을 제의한 건가요?
제작진 측으로부터 섭외를 받은 건 아니고 에이전트 쪽에서 제의해 주셨어요. 제의받았을 땐 손가락이 찢어진 상태라 오래 고민했어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3~4일 정도면 붙는 수준이었지만 저는 1cm 회복하는 데 한 달 반이 걸려서 걱정이었죠. 공을 던져야 하니까요.

입단 테스트에서 구속이 124km/h까지 나왔어요. 당시 구속 테스트와 제구 테스트 결과에 만족했나요? 연습과 실전에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아주 만족하지 못합니다. 구속도 스피드건이 다른 거였다면 더 잘 찍혔을 거예요. (웃음) 또 스피드건 위치가 되게 중요한데 (윤)석민이가 공에 맞으면 안 되니까 대각선 위치에 있었거든요. 사실상 더 나왔을 거로 생각하며 던졌죠. 연습 땐 재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제구는 그냥 감으로 하는 거죠. 연습하지는 않았어요.

프로 생활을 끝내고는 몸 관리를 어떻게 했나요?
다행히 제가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니 수강생들과 같이 훈련하는 게 많아서 몸 만드는 데 무리는 없었고, 선수를 그만둘 때 절대 이 몸무게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몸무게 유지에 힘썼어요. 운동은 꾸준히 해왔으니 밥양만 줄였어요. 원래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 4~5개월은 체중 변화가 거의 없어요. 체지방은 늘고 근육량은 줄잖아요. 근데 그 이후에는 주변 친구들만 봐도 10kg, 20kg 쉽게 찌니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식단만 조절했어요.

SK 와이번스 선수였을 때 다큐 ‘불타는 그라운드’를 촬영하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한 방송 출연은 어땠나요?
그때는 선수였고, 시합을 위한 방송이었죠. 지금은 방송을 위한 시합이니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달라요. 긴장감이 아예 다르죠. 물론 우리가 방송을 위해 시합을 조작했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방송은 어떻게 보면 재미도 필요하고 방송 콘셉트라는 게 있잖아요. 선수 때와는 아예 다르죠. 지나 보니까 그 시절 ‘불타는 그라운드’가 되게 빠르게 시도한, 시대를 앞서나간 방송이었단 걸 알았어요.

서울 베이스볼 리그(SBL, 한국인 선수와 한국 거주 외국인들로 구성된 생활 체육 야구 리그)에서 뛰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지인 중에 외국인 학교에서 근무하는 분이 계세요. 방송도 도와주시고 해서 소개도 받을 겸 우연히 갔다가 같이 한번 뛰어보자고 제안받았어요. 거긴 정말 ‘그들만의 리그’거든요. 생활 체육 야구처럼 체계적이지도 않아요. 야구장도 따로 없어요. 그래도 재밌더라고요. 영어도 많이 늘었어요. (어떤 부분이 재밌었나요?) 일단 분위기? 거기는 일반 생활 체육 야구와는 달라요. 매년 드래프트를 통해서 봄 소속팀과 가을 소속팀이 달라져요. 같은 팀 동료가 미래 상대 팀 경쟁자일 수도 있어요.

새로운 환경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운동하는 건 어땠나요?
파티도 열고 하는데 바빠서 못 가봤네요. 그래도 듣는 영어가 무척 늘었어요.

#프로야구 선수 이한진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저는 아주 작고 마른 아이였고, 운동을 되게 못하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저랑 같이 다니는 친구는 덩치가 아주 좋은 전교 1등이었거든요. 동네 야구도 없는 지역이었는데 지나가는 분이 제 친구한테 야구 할 생각 없냐고 물어봤어요. 정작 그 친구는 답이 없었는데 제가 손을 드는 바람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네요.

지금은 키도 192cm로 상당히 큰데, 언더핸드 투수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처음부터 투수를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성적이 너무 나쁘다 보니 궁지에 몰렸거든요. 근데 그때 당시 같은 팀 타자들이 밑으로 던지는 볼을 잘 못 쳤어요. 그래서 연습할 상대가 필요했는데 그걸 제가 하게 된 거죠. 저는 작고 말랐기 때문에 고등학생 때까지는 SSG 박종훈 같은 정통 언더핸드 투수였어요. 던지다가 바닥에 손이 긁히기도 했어요. 그러다 주변에서 키도 크고 힘도 센데 왜 밑으로만 던지냐는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팔이 점점 올라가더라고요. 올라가면 속도가 나니까요. 그런데 아예 내려서 확실히 언더핸드로 던질 걸 그랬어요. 후회하고 있어요.

고등학생 때 3개월 만에 체중 20kg를 증량했다고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에 키가 188cm에 68kg이었어요. 별명이 이쑤시개였는데, 감독님이 70kg가 안 되면 야구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3학년 여름에는 72kg 정도 됐는데, 대학 진학이 결정되고 고교야구 시즌도 끝나서 상상도 못 할 만큼 먹었죠. 먹는 걸 보면 되게 슬퍼요. 아침은 큰 그릇에 사골국이랑 밥을 먹고, 날달걀 7~8개를 풀어 들깻가루랑 섞어서 그냥 마셨어요. 점심은 학교에서 먹으니 저녁은 또 아침처럼 먹고, 한 시간 뒤에 삼겹살 구워 먹어요. 그때 하루에 달걀 한 판을 먹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날달걀을 먹고 남은 달걀들에서 흰자만 따로 빼서 또 먹고, 자기 전에는 길쭉한 크림빵하고 유산균 음료 큰 통을 하나 먹고 잠들었어요. 맨날 목까지 음식이 차 있었고 속도 불편했는데 한 달 반이 지나니까 만화에서 교복 터지는 장면처럼 셔츠 단추가 터지더라고요. 물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다 근육으로 만들었어요. (증량 후에 야구가 달라졌나요?) 그 이후로 싸움을 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웃음)

레이노드 증후군(손가락 끝부분의 조직이 혈액 내 산소 부족으로 손상돼 색조 변화, 통증, 조직괴사 등을 가져오는 질환)이 있다는 걸 언제, 어떻게 알게 됐나요?
그전까지는 아예 몰랐고요. 2008년 6월 27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알게 됐어요. 경기 전에 투수들은 손톱 깨지는 걸 막으려고 반창고랑 접착제를 붙여요. 그날도 붙이려고 보는데 오른손 손톱을 보니 까만 거예요. ‘내 손톱 왜 까맣지?’ 하고 넘어갔는데, 그날 불펜에서 몸을 푸는데 손가락에 감각이 없는 거예요. 당시 문학구장(현 인천SSG랜더스필드)이면 불펜이랑 관중석이 꽤 멀었거든요. 근데 던진 공이 관중을 맞출 뻔했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시합에 빠졌고 다음 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어요.

손가락 끝 감각이 중요한 투수로서는 발병을 알게 됐을 당시 정말 상심이 컸을 것 같아요. 그때 마음은 어땠나요?
슬픈 얘기지만, 저는 그전까지 야구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열심히 한다는 얘기를 듣는 그 누구보다 훨씬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정말 긍정적이었고 노력하면 결과는 따라온다는 생각이 있었죠. 근데 그 진단을 받은 후부터는 야구를 그만둘 때까지 열심히 한 적이 없어요. 열심히 할 수 없었어요. 그전까진 포기한 적이 없었거든요. 저는 운이 좋아서 프로에 왔다기보다는 노력으로 왔는데, 병을 알게 된 후에는 열심히 해 봐야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병을 알게 된 이후에도 5~6년가량 프로 생활을 더 했는데, 극복하기 위해 특별히 해본 게 있나요?
이 병을 고치려고 국내외 가리지 않고 병원을 스무 곳 넘게 다녔어요. 퇴마사까지 찾아가 귀신 쫓는다는 치료도 받아봤고, 할 수 있다는 건 다 해봤어요. 갑자기 온 희소병이고, 병원에서 주는 약은 너무 독해서 평소보다 땀도 너무 많이 나고 탈모도 생겼거든요. 약을 끊은 이후에도 부작용이 오래 가더라고요.

#프로의 세계

입단 2년 차 때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고, 감독님 방에 직접 찾아가 면담했다고 했어요. 어떤 마음으로 찾아간 건가요?
오키나와에서 일본팀하고 연습경기를 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계속 저를 내보내시는 거예요.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갑작스레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등 제구력 난조를 겪는 증후군)이 온 시기였거든요. 감독님이 고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했는데, 그때가 마침 손이 말려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멘탈이 깨져 있던 때라 감독님 방에 찾아갔죠. 시합에 덜 나가고 싶다고요. 미친 거죠. (웃음) 그렇게 들어가서 그 방에서 훈련을 2시간 동안 했어요. 섀도 피칭 동작이라고 수건을 들고 피칭했어요. 운동복 입고 들어간 거 다 젖었고요. 감독님도 대단한 게 다음 게임에 절 또 내보내시더라고요. 지나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감독님께 참 감사드려요. 선수를 위한 거였고, 선수를 향한 애정이었더라고요. 감독님과는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 당시 감독님과의 대화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힘들어도 스스로 이겨내라. 이런 메시지가 있었던 거로 기억해요.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제 투구폼을 제대로 지도받은 적이 없던 것 같아요. 제가 가진 강점과 제 폼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고, 프로에 가서 전체적으로 다 바꾸고 싶었어요. 감독님이 관심을 갖는다는 건 대단한 거니, 내 것을 다 없애고 다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의지가 생겼어요.

또 감독님이 레이노드 증후군 치료를 위해 다방면으로 알아봐 줬다고 들었어요.
한국에 있는 혈액 전문의사 선생님도 개인적으로 소개해 주시고, 한국 병원으로는 안 되니 혈액 관련 병원인 오사카 병원, 도쿄 병원도 다 직접 알아봐 주셨어요. 그래도 결국 답을 얻지는 못했어요.

은퇴 후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경찰야구단에서 코치를 맡았어요.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요?
야구를 더 해야 할지, 아니면 완전히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지 고민하던 중에 제일 먼저 연락을 준 곳이 경찰야구단이었어요. 제안받고 고민도 많이 했는데 그 당시 어머니가 다른 일을 해도 좋지만, 야구 안에 있으면서 사회를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그날 바로 경찰야구단 코치를 하기로 했죠. 저에겐 정말 잘한 결정이었어요. 저는 경찰청 4년이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거든요.

아무래도 경찰야구단에는 1군에서도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나 2군 유망주들이 많이 오잖아요. 퓨처스리그 북부리그에서 세 차례 우승(2016~2018년)도 했는데 뛰어난 선수들을 지도하니 어땠나요?
저는 뛰어난 선수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사실 처음 들어갈 때부터 1년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어요. 일단 사람이 잘 맞아야 거기 있는 거잖아요. 근데 유승안 감독님이랑 너무 잘 맞더라고요. 저는 할 말은 해야 하는 스타일인데 유 감독님이 의견 있냐고 물으면 자유롭게 얘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선수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방향을 설명만 해주고, 투구폼에 대해서는 절대 얘기하지 않아요. 대신 혼자 선수들의 폼을 다 분석해두고, 먼저 다가오길 기다렸죠. 유명한 애들은 내가 안 가르쳐도 유명하니까요. 갑자기 와서 누군가 가르치는 걸 달가워하지 않기도 하고요. 저는 투수들의 폼을 분석해뒀으니 물어보면 바로 답할 준비는 돼 있었어요. 그들이 원해서 피드백이 갔을 때 그 선수가 변하면, 그 이후에 주변 다른 선수들이 찾아오고, 점점 다른 기수에도 영향이 미치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느 정도 선수들과의 신뢰도 쌓였고요.

경찰청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성장해 1군 무대에서 뛰는 걸 보면 어떤가요?
너무 좋아요. KIA 타이거즈 박준표, SSG 스카우트가 된 박진우도 연락 많이 해요. (이)대은이도 가끔 연락하고, 키움 히어로즈 이영준이랑도 잘 지내요. 제자들을 볼 때마다 프로에서 뛸 때가 참 좋은 때라는 걸 느껴요.

#이선생과 한진회장(전 야구지니)

블로그도 운영했더라고요. 평소 글 쓰는 것도 좋아하나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경찰청 코치 할 때랑 끝나고도 조금 했었어요. 제가 원래 컴맹이라 이런 걸 아예 못 하는데, 제자들이 제대할 때쯤 제가 남겨줄 수 있는 선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 어떤 점을 지적했고, 무엇이 좋았고 어떤 게 안 좋았다는 걸 기록해 둔 거예요. 선수들은 여러 지도자를 만나며 야구 스타일이 바뀌니 저랑 있을 때 좋던 게 있다면 참고했으면 해서요.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어떤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까요?
그냥 제가 좋아서 한 거예요. 저는 제가 프로에서 잘 던지고 있는 선수들을 평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제가 가르쳤던 선수들에 관해서만 썼어요. 아니면 일본 선수나 메이저리거들을 분석했는데, 하다 보니 계속 우리나라 선수들도 써달라고 댓글로 요구가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리그 선수들도 썼죠. 누가 읽지 않아도 돼요. 그냥 선수들이 경찰야구단 시절에 좋은 느낌이 있었다면 한번 확인해보라고 쓰는 거예요. (그 선수들은 블로그의 존재를 아나요?)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알리지도 않았어요.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은 자신이 가장 좋을 때 모습을 찾아볼 거예요. 그러다 검색하는 과정에서 제 블로그를 우연히 찾길 바라는 거죠. 지금은 데이터가 잘 돼 있어서 태블릿으로 그런 걸 다 볼 수 있어요. 살짝씩 투구폼을 바꾸는 속에서 좋을 때의 감을 찾는 게 중요한 거죠.

‘한진회장’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원래는 개그우먼 김영희랑 선수 인터뷰도 하고 야구를 모르는 초보자를 위한 영상들을 올리며 시작했어요. 유튜브는 규정상 1년 안에 4,000시간을 채워야 하잖아요. 출연진이 바뀌게 되면서 제가 혼자 새벽에 영상 편집하며 채워 넣고 건강을 잃었어요. (웃음) 그 이후에는 좀 쉬다가, 이전 영상들을 삭제하고 새로 시작한 게 지금의 ‘한진회장’이에요.

지금은 PD나 제작진이 따로 있는 것 같던데, 기획이나 제작에도 참여하나요? 출연만 하고 있나요?
네. 기획부터 촬영까지도 다 참여하고 있어요.

예전의 지니마블처럼 여행을 가거나, 먹방, 미션 임파서블 같은 콘텐츠를 하기도 했더라고요. 예전엔 야구선수 인터뷰 콘텐츠도 있었는데 앞으로 채널의 방향성은 어떻게 가져가고 싶은지 궁금해요.
야구 관련 이야기도 담고, 다양하게 하고 싶어요. 야구를 주요 콘텐츠로 가져가되 저라는 사람은 어떤 매력이 있는지를 공유하는 영상이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사람 ‘이한진’을 담고 싶어요.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어요. 이 자리를 빌려서 소개 한번 해주세요!
‘드림파크 베이스볼’이라는 곳에서 야구를 가르치고 있어요. 유소년팀을 꾸려서 운영하는 건 아니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엘리트 선수, 생활 체육 야구선수를 1:1 개인 지도하고 있어요. 거의 쉬지 못하지만 가르치는 게 즐거워서 이어갈 수 있어요.

심리상담사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고요.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요?
대단한 건 아니고 저도 심리 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 공부하게 됐어요. 지금 선수들에게는 심리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카데미에서도 어떤 생각으로 야구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성장해야 할지에 대해서 직접 상담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제자 중 SSG 전영준 선수가 있더라고요. 아카데미 출신 제자인가요? 2022시즌에는 선발로도 나왔잖아요. 현역 때 뛰던 문학구장에서 제자의 활약을 보니 어떤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유급을 해서 마지막 1년 동안 저한테 배운 선수예요. 그 당시 수술해서 재활하는 단계였는데 집이 충남 아산이어서 먼데도 기차 타고 왔다 갔다 하며 배웠어요. 영준이는 프로 갈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연락해요. 지적보다는 대화를 많이 해요. 올해 상무야구단에 가게 됐지만 잘할 거예요.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선수이고, 가능성을 지녔어요. 일단 신체 조건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는 게 아예 없고요. 볼 속도에 비해서 힘도 좋아요. 어쨌든 1군 경험도 있잖아요. 던지는 모습 자체가 타자와 승부하는 느낌이어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요. 제 데뷔 첫 등판도 한화 이글스전이었는데 공교롭게 영준이도 한화전 선발이었네요. 첫 등판도 봤는데, 조금 아쉽기는 했어요. 볼 힘이 좋은데 타자와 승부하기보다는 조금 피하는 느낌이라서 직접 연락도 했어요. 공 하나하나에 생각이 너무 많아 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좋은 공부가 됐을 거라고요.

또 두산 베어스 이승진 선수와의 인연도 깊어 보여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언급되더라고요. 어떤 인연인가요?
SK에서 2년 정도 같이 선수 생활을 했죠. 저랑 띠동갑인데, 승진이한테 선배님 말고 삼촌으로 부르라 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선배님이라 부르긴 하지만 2군에 있을 때 늘 제 룸메이트는 승진이었어요. 곧 승진이랑 유튜브도 찍기로 했어요. 천진난만하고 돌발적인 모습이 언론에 많이 비쳐서 그렇지, 엉뚱하지만 선배에게 잘하고 본성이 착한 아이예요. 승진이랑도 야구 얘기를 많이 하죠. 승진이도 볼 힘이 좋은 만큼 앞으로 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정리한 지 이제 7년이 흘렀습니다. 앞으로 이한진의 인생은 어떻게 만들어가고 싶나요?
기회가 된다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싶어요. 야구와 관련되지 않은 일도 하고 싶은데, 결국엔 어떻게든 관련지을 것 같아요. 제가 엄청 야구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좋아해서 시작은 했지만, 원래 직업으로 보면 싫어지거든요. 근데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나니 오히려 게임을 할 때도 그렇고, 뭘 해도 야구만 해요. 지나 보니 내가 야구를 참 좋아하는구나 싶어요.

이한진에게 야구란, 단순한 직업은 아닐 것 같아요. 책임감도 생겼을 텐데 어떤 존재인가요?
아뇨. 책임감 없어요. 제게 야구란, 의식하지 않은 틈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마치 손톱 같은 존재예요. 모르는 사이에 금세 훌쩍 자라버리잖아요. 비유가 적절한가요?

마지막으로 팬과 독자들에게 인사 부탁합니다.
제가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이런 선수가 잠시 지나갔구나, 정도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대단하지 않은 건 저도 알고 있고요. <더그아웃 매거진>도 대박 날 수 있도록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한진회장’ 유튜브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 더그아웃 매거진 143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3년 143호 (3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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