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 뒤늦게 깨닫다
몇 해전 타계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1961~2020)는 인류 역사에서 돈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빚'(debt)이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지난 5000여 년의 인류 경제 역사는 빚을 통해 통제되어 왔으며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노동자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여전히 빚을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빚'(debt)이나 '신용'(credit)이라는 개념은 우리 생각보다도 훨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좀 더 내밀한 방식으로 우리의 경제 생활은 물론 다양한 삶의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한국스러우며 전통스럽고 (본의 아니게) 청빈한 삶을 추구했던 가정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사실 '빚'이라는 존재 자체가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다. 때문에 한국에 있을 때는 그 흔한 신용카드조차 사용해본 적이 있다. 신용카드의 편리함이나 신용카드 회사 등에서 제공하는 포인트 등 부차적인 프로모션조차 나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부분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미국에 와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빚'이라는 개념은 점점 다양한 방식으로 삶 속에 파고 들었다. 유학생 생활 초기에는 원래 해왔던 대로 나는 최대한 빚은 피하고 살고 싶었다. 차가 없으면 한 시간에 한 번 있는 버스더라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다녔다. 승객들이 타고 내리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주는 미국 버스이기에 임신 중에도 안심하고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차를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꾸준히 모으고 나서야 차를 샀다. 리스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대신 버튼이 아닌 손으로 고리를 돌려 창문을 열지언정 그냥 싼 차를 골라 타고 다녔다. 신용카드도 왠지 빚 같아서 여전히 쓰지 않고 한국 식으로 직불카드를 썼다.
그러다가 아이를 태어나고 원래의 생활 패턴을 점점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껴졌다. 무엇보다 남편이 졸업 후 임용이 되고 나도 같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한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살 생각을 하게 되면서 집을 구매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전세 개념이 없는 미국에서 매달 나가는 월세도 아깝게 느껴졌고 아이들이 활동적으로 커 가면서 아파트의 층간 소음도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학금으로 쪼개가며 생활하던 유학생 출신들이 집을 구매하려면 신용 점수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 집이 아니라 은행이 지분을 더 많이 차지하는 집이 될 터이니 모기지, 즉 주택 융자를 큰 문제 없이 승인받기 위해서는 높은 신용 점수가 필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와 남편은 미국에서는 우리의 '신용' 점수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신용 점수는 신용카드를 쓰고 다달이 신용카드 금액을 정해진 날짜에 잘 갚았다든가 자동차 리스를 했다거나 자동차 론을 통해 돈을 착실히 잘 갚아 나갔던 경험이 축적되어 올라가게 되는 것인데 우리 부부는 그런 경험이 전무했던 것이다. 빚이 없이 쪼들리는 대로 청빈(?)하게 살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빚이 없으면 신용도 없는 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결과였다.
결국 우리는 몇 년 뒤에 아이들과 터전을 잡을 집을 구매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신용 점수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용 점수가 없다 보니 신용카드조차 아예 승인이 나지 않아서 만들 수 없었다. 결국 아주 소액의 시큐리티 신용카드(Security Credit Card)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신용 점수가 아예 없으니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생각이 없고 그러다 보니 사용자가 얼마 간의 소액의 보증금을 미리 맡기고 그 보증금 한도 내에서 돈을 쓸 수 있는 신용카드를 발급 받는 방식이다. 이렇게 시큐리티 신용카드를 만들고 소액이라도 매달 쓰고 제 때 갚다보니 신용점수가 올라가고 몇 개월이 지나자 일반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을 만큼 신용점수가 올라갔다.
아무 것도 모르던 경제 바보 미국 유학생부부는 이제 신용점수를 차곡차곡 쌓고 미국 직장인이 되어 꿈의 첫 집 구매(이지만 은행 지분이 더 많은)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또래 아이들과 달리 아파트에서 (미국 가정은 소득 정도와 상관없이 대도시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당이 있는 땅 집에서 산다) 어린 시절을 참 많이도 보낸 우리 아이들에게 참 미안하지만 이 또한 경험이려니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려한다. 빚 없이 살던 삶에서 이제 빚 있이 사는 현대 경제 문명(?)에 들어서기 일보 직전인 우리 가족. 집도 자동차도 심지어 휴가 조차 '빚'으로 다녀오며 상대적으로 현재를 더 잘 누르고 즐기는 경향이 있는 미국 사회에서 이제 약간은 우리도 미국 스러워질 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든 아이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면 엄마 아빠는 일단은 다 좋다.
*칼럼니스트 이은은 한국과 미국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낙천적인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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