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환을 선언했던 글로벌 에너지 메이저들이 다시 석유·가스사업으로 회귀하고 있다.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 로열 더치 쉘, 에퀴노르 등 기업들은 탈탄소 전략을 공식화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기존 화석연료 중심 포트폴리오를 복원하며 투자 기조를 전환했다. 에너지 안보 위기와 유가 변동성, 수익성 저하가 주요 배경이다.
반면 한국 정유업계는 세계적인 석유 소비국임에도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각종 정책 지원에서 제외되며 산업 경쟁력 저하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수요는 견조한 반면 산업 전반이 사양화된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에 대해 업계의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석유로 회귀하는 세계…글로벌 정유사 전략 '급선회'
영국 BP는 2020년 당시 CEO였던 버나드 루니 체제 아래서 '넷제로(탄소중립) 에너지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2030년까지 석유 생산량을 2019년 대비 40%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글로벌 에너지 산업의 전환 흐름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전략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2023년 루니가 물러나고 머레이 오친클로스가 신임 CEO로 취임한 이후 기조는 급격히 바뀌었다. BP는 2024년 2월 석유·가스 부문에 10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기존 감산 계획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에너지 수요 회복과 유가 변동성 확대, 투자자들의 수익성 요구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네덜란드 영국계 에너지 기업 쉘도 유사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2021년 벤 반 버든 전임 CEO는 2030년까지 석유 생산량을 연 1∼2%씩 점진적으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2023년 와엘 사완 CEO가 취임한 이후 기조는 확연히 달라졌다. 쉘은 친환경 프로젝트 예산을 줄이고 석유 생산량을 매년 1%씩 늘리겠다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최근에는 BP의 일부 사업을 인수할 가능성도 거론되면서 석유 중심의 포트폴리오 강화 움직임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 기업 에퀴노르 역시 예외는 아니다. 2021년 안데르스 오페달 CEO는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2025년 이후 전략에서는 일부 재생에너지 사업의 축소와 함께 기존 원유 생산량을 10% 확대하겠다는 수정안을 내놨다. 에너지 안보와 원가 경쟁력 확보가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미국 정유 메이저들의 움직임은 한층 더 공격적이다. 엑손모빌은 2023년 미국 최대 셰일 업체 중 하나인 파이오니어 내추럴리소스를 600억달러(약 80조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거래는 미국 에너지 패권 강화와 동시에 엑손모빌의 셰일 자산 보유를 극대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어 2024년 초에는 셰브론이 미국 해상 원유 생산 업체 헤스를 530억달러(약 70조원)에 인수하면서 원유 생산 역량을 대폭 확충했다.
이러한 행보는 미국이 셰일과 해상 원유를 중심으로 하는 '에너지 자립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마이크 워스 셰브론 CEO는 "셰일과 해양 자산은 향후 30년 동안의 캐시카우"라며 기존 석유 자산의 전략적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글로벌 기후 대응 공약과는 상반되는 듯한 흐름이지만 에너지 공급 안정성과 단기 수익성 확보를 우선순위에 둔 결정들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이 같은 전통 에너지 회귀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재생에너지 보조금 폐지, 연방 토지의 석유·가스 시추 확대, 탄소 배출 규제 완화 등 화석연료 산업에 우호적인 정책들을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는 미국 에너지 메이저들의 전략적 확장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며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석유·가스 중심 회귀에도 강력한 추동력이 되고 있다.
석유 수요 줄지 않는데…'사양산업' 낙인 속 고립된 정유업계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계 석유 수요가 2030년을 정점으로 둔화되겠지만 급격한 감소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항공, 해운, 석유화학 등 탈탄소 전환이 어려운 산업군에서는 수요가 꾸준히 유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석유 수요의 증가세는 OECD 외 국가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연평균 1% 안팎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국내 정유업계는 이와는 다른 위상과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한국은 업스트림(탐사·생산)보다는 다운스트림(정제·판매)에 집중된 산업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8%에 불과했다. 6개 분기 영업적자를 기록하는 등 유가 상승기에도 일시적 수익에 그치는 구조적 저수익성이 고착화되고 있다.
정유업계가 강조하는 문제는 세제 역차별과 제도적 배제다. 대표적으로 석유화학 원료로 사용되는 중유(B-C유)에 대해 리터당 17원의 개별소비세가 부과되는 현행 세제가 지적된다. 항공유·납사·아스팔트 등 비과세 제품들과 달리 중유는 세금 환급도 불가능하다. 이는 곧 수출 경쟁력 저하로 직결된다. 세계 66개 주요국이 자국 내 정제공정 원료용 중유에는 개별소비세를 면제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 같은 세제 구조에 더해 정부가 올해 말까지 연장한 임시 투자세액공제 제도에서도 정유업계는 제외된 상태다. '대기업'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2024년 기준 전체 임시 투자세액공제 예상 규모는 1조6558억원이며 이 중 대기업 몫은 9308억원에 달한다. 대기업의 투자 여력은 분명함에도 정유업계는 제도적 혜택에서 배제된 상태라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박주선 대한석유협회 회장은 "정유업계는 세계적인 경기침체, 유가 하락, 석유제품 소비 감소, 기후변화 대응 등으로 인해 다중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에너지 전환을 위해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인데도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정책적 배제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석유제품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음에도 산업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제도 설계가 현장에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는 이 같은 정책 불균형이 외국인 투자 위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수출 감소와 환율 변동성, 금리 상승 등 복합 악재 속에서 국내 정책 신뢰 저하가 외국계 제조기업의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정유업계는 정부가 에너지 전환 기조를 유지하더라도,현실 기반의 균형 있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 산업은 글로벌 경쟁 심화와 만성적인 저수익 구조라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다"며 "재생에너지와 화석연료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수요 구조와 산업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전략적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지원 기자
Copyright © 블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