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랑 말이랑 사는 곳이 뒤바뀐다면? [수상한 말수의사]


가끔 영화나 티브이에서 서로 영혼이 뒤바뀌어서 다시 태어난 스토리가 나온다. 남녀가 서로 영혼이 뒤바뀐다던지 또는 시대가 바뀐 세상으로 영혼이 뒤바뀌는 스토리 말이다. 물론 내가 동물과 영혼이 실제로 뒤바뀌는 기묘한 경험을 하진 못했지만, 동물의 터전에 들어가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영혼이 바뀐 걸 더 가까이 상상할 수 있는 신기한 행사가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연둣빛 들판이 제법 멋있어지는 어느 봄날이었다. 푸릇한 들판이 많은 제주도에는 말이 곳곳에서 방목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제주 고유의 말인 천연기념물 ‘제주마’는 제주축산진흥원이라는 곳에서 보존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이들을 ‘제주마 방목지’라고 하는 넓디넓은 관리된 들판에 풀어서 키운다. 그 공간은 귀한 신분이신 제주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방목지 풀밭 안으로 사람의 출입은 당연히 제한된다. 그래도 저 멀리서 전망대로 귀여운 제주말을 떼로 관찰할 수 있는 이색적인 공간이어서, 개인적으로 내가 제주에서 손꼽히게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이다.

제주마 방목지 :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주축산진흥원에서 이들을 방목 관리한다.

제1회 제주마 입목 및 문화 축제

그런데 올해 최초로 그곳에서 “제주마 입목 및 문화축제”라는 것을 개최하며, 한 번도 사람에게 개방된 적 없는 제주마 방목지의 안쪽을 사람이 피크닉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틀간 완전히 개방한다는 것이다. 방목지 ‘안’에서 여러 가지 부대행사까지 할 것이라는 축제 포스터를 보고 나는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최초’, ‘처음’이라는 것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그런데 내가 틈만 나면 가서 구경하는 “금인(人)”의 공간인 저 마방목지를 사람에게 열어줘서, 내가 저 풀밭을 최초로 내 발로 밟을 수가 있다니 너무나 설레었다.

사람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곳은 문화재 보존 구역이며, 사람은 절대 출입금지라고 꽁꽁 싸인 공간이 개방되었다는 게 신기했고, 내가 제주마만 살 수 있는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내가 마치 말이 되어서 입장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묘했다. 축제 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다. 주차대란으로 인해 내가 주차에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황송하게도 마방목지의 일부를 주차공간으로 아예 활용하고 있었다. "금인(人)"의 공간인 울퉁불퉁한 방목지 안에 들어가 황송하게 주차를 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내가 말이 된 것처럼 내 발을 풀밭에 내디뎠다.

수십 마리의 말 떼들이 풀을 먹던 이 공간은 딱 이틀간 사람의 공간이 되었다. 그 많던 한가로이 풀 뜯어먹고 앉아서 쉬던 말 떼들 대신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다양한 부스 행사를 즐기고 있었고, 연을 날리고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저 멀리에는 파란 바다의 수평선이 코앞처럼 보이고, 적당한 나무 그늘까지 드리우는 공간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누워서 제대로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초지 안에는 거대 마시멜로 (말이 먹는 풀 헤일리지를 숙성시키고 운반하기 편하게 비닐로 포장해 놓은 것) 위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을 마련해 놓았다. 거기에 들판을 정비하는 거대한 트랙터나 건초블록들 역시 누구나 만져보고 사진 소품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센스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말동네에서는 일상적인 물품이 오늘은 재미있는 사진 소품이었다.

거대 마시멜로 위에서 소인이 된 동행인
어린이가 그린 말 그림 전시 공간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연도 날리고 비눗방울도 불며 즐길 수 있었던 '제주마 입목 및 문화 축제'

부러운 너의 삶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방의 풍경을 보며 왠지 샘이 났다. ‘말 너희들은 이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이 좋은 풍경을 매일 누렸구나. 앞은 오션뷰, 뒤는 한라산뷰인 이 끝내주는 명당을 너희가 맘껏 누리고 있었구나.’ 부러운 마음을 연결해서, 내가 그냥 아예 여기에서 제주말이 된 채로 살면 내 삶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태어났는데 이미 나는 금수저다. 태어나보니 엄빠가 제주마이고, 나 역시 순혈 제주마로 선정되었기에 사람들의 보호 아래에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밥을 주고, 적절하게 나를 보호해 주며, 나는 언제나 항상 신선한 풀을 뜯어먹을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풀 먹고 졸다가 똥 싸고 가끔씩 누워서 자는 것이다. 맹수가 나를 공격할 일도 없고, 노역하며 대갓집 노비로 살 일도 없다. 가끔 사람들이 날 쳐다보고 사진 찍는 게 귀찮긴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내 공간에는 절대 침범하지 않으니 말이다.

원래는 말의 공간
오늘만 사람의 공간

마방목지 안 풀밭에 앉아서 말이 된 것처럼 멍 때리며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나는, 공을 차며 앞을 뛰어가는 귀여운 아이의 신나는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사람이랑 말이랑 사는 곳이 뒤바뀐 그날이었기에,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해볼 수 있었다.

아, 그러면 거대한 안방을 사람에게 모조리 준 지금 말들은 어디에 있냐고? 말들은 축제 이틀 동안 잠시 넓은 초지를 떠나, 한쪽 울타리에서 오래간만에 모여서, 제대로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중이었다. 원래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말이 사람에게 안방을 양보하고 오래간만에 뭉쳐있으니 조금은 답답할 만도 하겠다.

'말들아, 너희 오늘 집을 빼앗긴 것 같아서 좀 짜증 났지? 고생 많겠지만 그래도 잠시만 좀 봐주라. 너희만의 세상이었던 너희의 영역을 아주 잠깐만 우리에게 좀 공유해 주면 말이지.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토종 조랑말인 '제주마'라는 품종이 존재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가 되고 있는 너희에게 관심을 더욱더 가지게 될 수 있어. 그러다 보면 너희가 어제보다는 더 인기가 올라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너희를 보러 올 거야. 그러면 혹시 아니? 하늘에서 꿀맛 나는 당근이 우수수 떨어질 지도? 거짓말 치지 말라고? 그래. 그냥 사죄한다. 그래도 말이야. 나는 오늘의 뒤바뀜 덕분에 너무나 특별한 기억을 간직하게 된 것 만으로 너무나 고마워.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살며, 무거운 물건도 들어주고 밭도 갈아주며, 우리와 함께 존재해준 것도 이 기회를 통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구나.'

초록빛 풀밭과 투명한 하늘과 적당한 바람은 여느 제주도의 풍경과 같은데, 자세히 보면 사람과 말이 뒤바뀐 곳에 존재하면서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어느 특별한 봄날이었다.


* 글쓴이 - 김아람
제주도에서 말을 치료하며 느끼는 수의사의 속마음과 재미있는 말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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