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정치 복원? 17년 전 노무현, 한나라·민노당에서 배워라
세대별 차등 인상 등 쟁점에 17년 전처럼 고난도의 정치력 발휘해야
정부가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고 은퇴 전 소득 대비 연금액을 뜻하는 소득대체율은 올해 수준인 42%로 유지하는 개혁안을 지난 9월 4일 내놨다. 중장년일수록 보험료가 빠르게 오르도록 보험료율 인상 속도에 세대별 차등을 뒀고, 가입자들의 기대 여명과 가입자 수 증감에 따라 연금액을 조정하는 자동조정 장치를 2036년 이후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정부가 구체적인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놓은 것은 2003년 이후 21년 만이다. 국민연금의 재정을 전망하고 보험료 등을 조정하기 위한 국민연금법상의 ‘재정계산’은 2003년 처음 했는데 2047년에 기금이 소진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참여정부는 이 계산 결과를 토대로 국민연금의 재정 안정을 위해 ‘더 내고 덜 받는’, 즉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낮추는 법안을 국회에 2003년 10월 제출했다. 이후 3년 8개월간의 진통 끝에 2007년 개혁이 이뤄져 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기존 소득대체율 60%를 2008년 50%로 낮춘 뒤 해마다 조금씩 떨어져 2028년 40%에 도달하도록 설계) 체제가 만들어졌다. 노인 중 소득하위 70%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기초노령연금)도 이때 도입됐다.
이후 17년간 국민연금 개혁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두 번째 재정계산이 있었지만 이때는 ‘9%-40% 체제’의 안착이 주된 과제였고, 세 번째 재정계산이 이뤄진 박근혜 정부에선 기초연금-국민연금 연계 논란이 벌어져 국민연금 개혁을 논의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네 번째 재정계산이 이뤄진 2018년엔 개혁 기대감이 높았으나, 문재인 정부는 4개의 개편안을 병렬적으로 발표한 후 쟁점 논의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넘겼다. 그러나 경사노위 역시 단일안을 내지 못하고 3개의 개편안을 발표한 뒤 활동을 종료했다.
그간의 개혁 실패 사례에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것은 정부의 ‘입장 부재’였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을 비롯한 구체적인 정부안을 21년 만에 내놓았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다음 단계다. 국민연금 개혁은 미래세대에게 지나친 짐을 지우지 않도록 세대 간 형평을 기하면서 적절한 노후소득 보장이란 애초의 제도 취지도 놓쳐선 안 되는 고난도의 정치 과정이다. 그런데도 정치 역량을 보여줬어야 할 국회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수년간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은 채 사회적 대화나 전문가 합의만을 강조해왔다. 정치권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전문가들 사이에선 소득대체율 인상론과 재정안정론이 부딪쳐 접점 없이 논쟁만 되풀이됐다. 국민연금은 안 그래도 복잡한 제도인데, 양측 대립이 격해지면서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노인빈곤 개선에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등의 기초적인 사실관계마저 ‘합의’되지 않는 상황이다. 정부안이 마련됨으로써 개혁 논의의 출발선은 그어졌지만, 각 정당이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정부안을 둘러싼 전문가 공방만 이어지다가 개혁의 불씨는 사그라들 것이다.
어떻게 해야 연금정치가 ‘가동’될까. 2007년 마지막으로 이뤄진 국민연금 개혁 과정이 한국형 연금정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야당들은 정부안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정부안의 취약점을 보완할 대안을 각자 가져왔고, 정부는 이 대안들을 토대로 타협안(기초노령연금 도입)을 제시함으로써 돌파구를 만들었다. 이때 개혁에 실패했다면 국민연금 소진 시점은 여전히 2047년이었을 것이고(지난해 다섯 번째 재정계산에서는 소진 시점이 2055년으로 나타났다), 노인빈곤율을 낮췄다고 평가받는 기초연금제도는 지금 없었을 것이다. 2007년 연금개혁 과정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연금정치의 ‘조건’을 살펴보자.
■2007년 개혁은 어떻게 가능했나
참여정부 시기 연금개혁 논의가 처음부터 불붙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6월 국민연금의 첫 번째 재정계산 결과를 토대로 정부는 보험료율을 15.9%(당시 보험료율 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50%(당시 소득대체율 60%)로 낮추는 법안을 그해 10월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여야는 국민연금에 대해 별 논의를 하지 못한 채로 이듬해(2004년) 총선 국면을 맞았다. 이어 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정부의 법안은 폐기됐다.
당시 참여정부는 개혁 이전에 ‘제도 불신’부터 극복해야 했다. 2004년 여름 인터넷상에선 사실과 다른 ‘국민연금 8대 비밀’이라는 글이 확산했고 ‘안티 국민연금’ 운동이 벌어졌다. 정부는 ‘국민연금 비밀 바로알기’ 자료를 배포하고 가입자 불만을 사항을 제도 개선에 반영하면서 ‘안티 사태’를 진화한 뒤 국민연금 개혁 법안을 2004년 10월 다시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의 법안에 대해 야당들과 시민단체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보험료 인상에 대한 반박도 있었지만, 국민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당시의 수많은 고령자 즉 광범위한 사각지대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때 야당인 박근혜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은 비판에 그치지 않고 가장 먼저 정책 대안을 마련했다. 64세 이상 모든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연금의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기초연금의 소득대체율은 9%로 시작해 2028년까지 20%로 높이기로 하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60%에서 20%로 크게 낮추자는 내용이었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기존(9%)보다 낮은 7%를 제시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정부안을 수정한 대안을 마련했는데 소득대체율은 정부가 제시한 대로 낮추고(60%→50%), 보험료율 조정은 4년 뒤로 미루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양당은 1년여 동안 각자의 안을 고집하며 대립했다.
지루한 대치 국면을 깨뜨린 것은 2006년 2월 새로 취임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이때 복지부는 두 차례에 걸친 내부 토론회를 통해 한나라당이 주장한 기초연금을 받아들여 ‘기초노령연금’ 제도를 도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가장 큰 걸림돌인 재원은 국무조정실,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와의 회의를 통해 증세 없이 세출 구조조정, 비과세 감면·축소 등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복지 확대에 늘 부정적인 경제부처를 움직인 것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었다. 유시민 당시 복지부 장관(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유튜브 방송에서 기초연금 도입의 ‘결정적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첫해에 얼마 드는데?’ 물어보시더라고요. (중략) 기획예산처 장관님한테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렇게 한다니까 잘 얘기해서 도와주시오’ 전화하셔서 내부적으로 추진하기로 됐어요. 그 후 국회에서 대상을 늘려라 해서 ‘돈 더 주셔야 되겠는데요’ 했더니…. (중략) ‘아니 뭐 싫으시면 말고요. 어르신들 노무현이가 잘 모신다고 해놓고 잘 모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했더니 (대통령이) ‘알았어’ 하시더라고요.”
이상이 2006년까지의 얘기다. 이때까지는 정부 개혁안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타당한 대안(기초연금)을 내세웠던 한나라당과 그 대안을 받아들인 정부의 ‘플레이’가 돋보였다면 2007년 마무리에선 ‘캐스팅보트’ 민주노동당의 활약이 컸다.
■캐스팅보트 ‘민노당’의 활약
기초노령연금 도입을 담은 정부 법안이 다시 국회에 제출된 이후 개혁 논의는 급물살을 탔지만, 야당들은 여전히 정부안에 회의적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정부안에 맞서 국민연금·기초연금 단일안을 만들었다. 이 단일안은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노동당의 색이 강했다. 기초연금을 도입하면서도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크게 약화하지는 않도록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을 설득해낸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정당과 진보적인 정당이 손을 잡고 정책대안을 만들어낸,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다.
다만 ‘결전’이 이뤄진 2007년 4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선 또 한 번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라당-민주노동당의 기초연금·국민연금 법안과 정부의 국민연금 법안이 모두 부결되고 정부의 기초노령연금 법안만 통과됐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민주노동당과 함께 만든 법안에 투표하지 않았다. 정부로서도 난감한 결과였다. “국민연금법 개정이 입에 쓰기에 기초노령연금법안을 사탕과 같이 올려놨는데, 약사발은 엎고 사탕만 먹었다”(유시민 전 장관)는 말이 나왔다.
기초연금만 도입하고 국민연금 개혁에는 실패했다는 비판 여론 속에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최종 협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양당의 협상 결과는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앞선 단일안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낮추지만(60%→40%) 기초연금을 도입함으로써 노후소득 보장은 약화시키지 않는 법안이 만들어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을 설득해 만든 연금 단일안이 없었다면 거대 양당의 협상 결과는 퍽 달랐을 것이다.
■타협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지난 9월 4일 정부가 발표한 국민연금 개혁안으로 다시 돌아오자. 2007년의 기초연금과 같은 타협점이 이번에도 나올 수 있을까.
일단 ‘전선’은 보험료율 인상 세대별 차등 적용을 둘러싸고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자동조정장치가 급여 삭감으로 이어진다는 논란이 있지만, 정부는 한발 앞서 2036년·2049년·2054년 도입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충분한 논의와 세밀한 검토를 거쳐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중장기 과제’로 설정했다. 정부가 제시한 소득대체율(42%) 역시 민주당과 시민단체에서 강력 반발하고 있지만, 지난 9월 12일 국민의힘이 “42%와 45% 사이에서 국회에서 절충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김상훈 정책위의장)며 협상할 공간을 만들었다. 앞서 21대 국회에서 여야는 보험료율 13%에는 합의했으나 소득대체율에선 43%(국민의힘), 45%(민주당)로 입장이 갈렸고, 이재명 대표가 국민의힘이 수정 제시한 44%를 수용하겠다고 했으나 국민의힘이 구조개혁도 해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련의 ‘줄다리기’가 보여주는 것은 소득대체율 역시 타협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세대별 인상 차등을 두고 여야가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민주당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 제도”가 저소득 중장년에게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다만 “가입이력이 짧아 과거 후한 소득대체율의 혜택을 못 누린 중장년에게 청년보다 빠른 보험료율 인상은 부당할 수 있으므로 이들을 위한 감면 특례 등의 보완 등을 모색하자”(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는 제안도 있다.
사실 절충과 타협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것은 무엇보다 ‘개혁 의지’다. 오 정책위원장은 “노무현 정부의 경우 정부안을 제시한 후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현 정부가 낸 정부안은 지난 2년 동안 안 내다가 떠밀려 낸 성격이 강해 앞으로 얼만큼의 추진력을 보여줄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들이 정책 정당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줄지도 미지수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2007년 국민연금 개혁 성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주목해야 할 사람이 기초연금을 제안한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민주당이 연금개혁에 의지가 있다면, 비판만 하지 말고 박근혜처럼 역제안을 해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기성정당에선 볼 수 없던 정책적 역량으로 거대 양당에 자극제가 됐던 민주노동당 같은 ‘캐스팅보트’가 없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개혁신당(3석)이 국민연금의 구연금·신연금 분리 대안을 내며 개혁 논의에 참여할 의지를 보이지만, 의석구조상(민주당 계열 175석·국민의힘 계열 108석·조국혁신당 12석) 영향력을 가지기 힘들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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