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경호강 맑디 맑은 물, 조선 의류 혁명을 꽃피우다
경호강은 이제 한국 목면의 고향 단성을 향해 5시 방향으로 내려간다.
거울처럼 물이 맑다는 경호강은 강폭이 비교적 넓고 큰 바윗돌이 없어 모래톱이 발달했다. 퇴적된 모래톱과 잔돌 적분에 경호강은 유속이 빠르면서도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거의 없어 래프팅 장소로 인기가 많다. 상류에 공단이 없어 수질도 아주 깨끗하다. 은어는 유속이 빠르고 이끼가 많은 곳을 좋아하는데 경호강 바닥은 전부 돌밭이라 이끼가 매우 풍부하다. 게다가 산청군의 지속적인 치어 방류로 경호강은 국내 최대 은어 서식지가 됐다.
경호강의 맑은 물은 조선에 의류 혁명을 일으키고, 조선의 경제사를 다시 쓰도록 했다. 그 현장이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 문익점의 시절에는 진주 강성현 배양리였다. 배양(培養)의 사전적 의미는 식물을 북돋아 기른다는 뜻이다. 마을 이름은 삼우당 문익점의 처남 주경(周璟)의 호를 배양재(培養齋)라한 데서 유래한다지만, 목화 재배가 처음 시작된 곳의 이름이 '배양마을'이라는 것은 어쩌면 운명적일지도 모른다.
문익점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정몽주와 과거 동기이다. 문익점은 과거 급제 2년 뒤인 1362년(공민왕 11년) 사신의 일원으로 원나라에 가는데, 이로 인해 그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당시 사신단의 목적은 공민왕을 왕위에서 내쫓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세우려는 원나라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였다. 문익점은 이때 덕흥군 쪽에 줄을 섰다가 실패하고 조용히 귀국하면서 목화 씨앗 10여 개를 '주머니'에 넣어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붓두껍이 아니라 주머니였다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공민왕 밑에서 관직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 문익점은 1364년(공민왕 13), 가져온 목화씨를 이웃 마을에 살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반씩 나누어 심었다. 살아남은 것은 장인 정천익이 심은 단 한 개. 정천익이 살린 하나의 씨앗은 100여 개가 되고 이듬해에는 온 마을에 나누어 심을 정도로 종자가 늘었다. 10년도 되기 전에 목화는 삼남은 물론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퍼져나갔다.
문익점과 정천익이 목면 재배에 성공한 것은 1365년, 불과 25년 뒤인 1390년(공양왕 2)에 고려 조정은 혼수품을 값비싼 비단 대신 무명으로 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36년 뒤인 1401년(조선 태종 1)에는 백성 상하가 모두 무명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목화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백성들은 삼베나 칡넝쿨 껍질인 갈포로 옷을 지어 입었다. 생산이 상대적으로 쉽고 보온성이 뛰어난 목면의 보급 이후 백성들은 매서운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겨울옷에는 솜을 넣어 입고 따뜻한 이불도 지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한반도 전역에 의류 혁명을 일으켜, 백성들의 의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375년(우왕 원년)에 다시 중앙 정계에 복귀하게 되지만, 고려왕조가 저물면서 그도 정계에서는 물러나게 된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는 세상을 바꾸었다. 목화의 경제적 효용성이 알려지면서, 농가들은 가을철에 목화를 수확해 물레에 돌려 실을 뽑았고 베틀에서 옷감을 짰다.
조정은 쌀 대신 면포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목면이 화폐의 역할까지 한 것이다. 목면은 특히 군정(軍政)과 관련된 세금으로 많이 징수되었다. 조선은 영조 이후 균역법을 통해 군포를 납부하면 군역을 면제했는데, 이는 나중에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17세기부터 조선의 향리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갓난아이까지 군적에 올려 면포를 강요하곤 했다. 영조 대에는 백성들에게 거두는 군포의 양을 2필에서 1필로 줄여주고 균등하게 부과하는 균역법이 시행되기도 했으나 온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양반들은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金在魯)가 "사대부는 비록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군역의 염려가 없습니다"라고 임금 앞에서 당당히 얘기할 정도였다. 양반이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은 조선 말 대원군의 호포법 제정 이후부터였다. 이때에도 양반은, 자신들은 군역의 부담을 지지 않는 계층이라며 노비의 이름으로 군포를 납부했다.
목면은 대외교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으로부터 후추, 상아, 물소 뿔 등을 수입하면서, 조선은 대금으로 목면을 지급했다. 면은 일본 영주들이 선호하는 사치품이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해마다 수천 필씩 조선 면포를 무역으로 가져갔다. 목면이 일본에서 의복 소재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조총에 쓰인 심지도 목화솜으로 만들어졌다. 목화 심지는 쉽게 불을 붙일 수 있고 한번 붙으면 잘 꺼지지 않았다. 조선을 침략할 때 왜군이 타고 왔던 배의 돛도 조선이 수출한 무명천이었다.
문익점의 목화 재배와 직조 기술 도입은 당시에는 엄청난 혁신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거기에 머무른 채 산업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멀리 인도에서 온 목화는 중국을 거쳐 문익점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고,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일본으로도 퍼져나갔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는 아시아면으로 불리는 품종이다. 목화는 육지면과 아시아면 등 4가지 품종이 있는데 지금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품종의 90% 이상은 육지면이다.
조선은 문익점 이후 조선 말까지 품종을 개량하거나 새로운 품종을 도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선에서의 방직은 가내수공업이었고 벼농사의 보조에 불과했다. 가내수공업으로는 판매를 위한 대량 생산은 물론 일관된 품질의 확보가 어렵다. 방직업의 산업화 자체가 조선에서는 불가능했다는 의미이다.
증기기관의 활용이 본격화된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방직업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에서는 목화재배가 불가능했다. 영국의 면직공장에 사용된 목면은 흑인 노예들이 피땀으로 재배한 미국 남부의 목화였다. 미국 남부가 흑인 노예 해방에 기를 쓰고 반대한 이유도 목화재배 때문이었다.
1830년대 미국 수출에서 목화의 비중은 50%를 넘었다. 기계로 대량생산된 영국산 면직물은 인도로 팔려나갔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값싼 영국산 면직물로 인해 수작업에 의존하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무너졌다. 인도는 정치적 식민지 이전에 먼저 영국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었다.
스벤 베커트는 <면화의 제국>에서 유럽이 네트워크와 군사력, 자금력으로 면화 생산과 유통 과정을 좌우하면서 면화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 이후 영국으로부터 면방직 기계를 도입하고, 목화 품종도 수확량이 많고 실의 길이가 긴 육지면으로 바꾸었다. 섬유 가닥이 길면, 현대적인 면제품을 생산하기에 유리하다.
조선에서 의류 혁명을 일으켰던 목면 산업은 이제 일본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 방직 상품의 시장으로 전락했다. 관세의 개념조차 몰랐던 조선은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비과세는 물론 일
본 화폐의 조선 유통까지 허용했다. 이후 조선은 면제품 수출의 나라에서 면제품을 수입하는 국가로 바뀌었다.
1904년 일본은 미국의 육지면 종자를 한국에 들여와 목포 고하도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하고 남부지방에서 육지면 재배를 강제한다. 한국은 일본과 인접해 운수·교통이 편리한 데다가 토양이 면화 재배에 적합해 품질이 아주 양호했기 때문이다. 1906년에는 목포에 조면 공장을 세운다. 공장 노동자의 대부분은 13~18살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면화는 목포항을 통해 일본 나고야로 반출돼, 일본이 1차 세계대전 특수를 톡톡히 누리는 바탕이 되었다.
1917년에는 부산에 조선방직이라는 국내 최대의 회사가 일본 자본에 의해 설립된다. 조선방직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매콤한 낙곱새(낙지·곱창·새우) 볶음 식당이 밀집한 곳이 '조방 낙지 골목'으로 불릴 정도로 지금도 부산 사람들의 뇌리에는 '조방'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박현수의 <경성 맛집 산책>에 따르면 당시 하루 12시간 일하는 여성 직공이 휴일 없이 일할 때 받는월급을 지금으로 환산하면 40만~45만 원 수준이었다. 이들의 일당은 식민지 경성 모던 카페의 음료 한 잔 가격에 불과했다. 일본인 남성의 임금이 100이라면 조선인 남성은 43, 조선인 여성은 25 정도를 받았다.
이때 일본의 방직기 생산 업체 가운데 하나가 도요타였다. 도요타는 1937년 자동차 생산 분야에 진출해, 6.25 전쟁 때 군납품으로 떼돈을 벌었다. 이를 계기로 도요타는 세계 자동차 생산 1위 기업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는 면화를 보기가 쉽지 않다. 해방 이후 들어온 미국의 잉여 농산물 가운데는 밀과 원면이 많았다. 값싼 미국의 원면은 한국의 면화 재배를 초토화했다. 생성형 인공지능인 구글 제미나이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면화 재배는 전체 농경지 면적의 약 0.002%, 세계 면화 생산량의 약 0.001%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줄었다. 목화를 처음 이 땅에 들여왔던 문익점 선생의 넋이 있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국의 밀과 원면은 공짜였지만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넘긴 원면과 밀은 민간에 불하되었지만, 불하 대금의 사용은 미국의 관리하에 있었다. 불하 대금이 가장 많이 쓰인 곳은 미국산 무기 구입이었다.
/김석환 부산대 석좌교수·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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