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인 엔진 발명가".. 루돌프 디젤 죽음의 '숨겨진' 미스터리

1913년 9월 30일, 한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루돌프 디젤. 맞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디젤 엔진’을 만든 인물이죠. 실종 약 2주 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 그는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요?

루돌프 디젤은 '누구'인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루돌프 디젤은 185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테오도르와 어머니 엘리제는 모두 바이에른 출신이었는데요. 디젤 역시 스스로를 바이에른 사람으로 여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그가 10대로 접어들 무렵, 보불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인데요. 프랑스와 프로이센, 즉 지금의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디젤 가족에도 위기가 닥칩니다. 파리에 사는 독일인 가족의 신변에 위협이 따랐던 거죠. 결국 디젤 가족은 10년 넘게 뿌리 내렸던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의 루돌프 디젤

디젤의 런던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왕립직업학교의 수학 교사였던 친척이 그를 돌봐주기로 했기 때문이죠. 그는 이곳에서 재능을 마음껏 펼칩니다. 독일어가 서툴렀음에도 왕립직업학교를 1등으로 마쳤고, 2년 뒤에는 아우크스부르크 공업학교를 학교 역사상 가장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죠. 뒤이어 들어간 뮌헨기술대학에서도 역사상 가장 높은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았고요. 디젤의 삶은 탄탄대로처럼 보였습니다. 제빙기 회사의 엔지니어가 되어 높은 연봉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죠.

디젤은 '무엇'을 했을까?

하지만 디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어요. 새로운 도전을 꿈꿨거든요. 그가 꾼 꿈은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엔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직후부터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93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특허 등록에 성공했죠. 물론 특허가 등록되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에요. 특허는 말 그대로 특허일 뿐이니까요. 실용화를 위한 험난한 과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1897년에 만들어진 첫 디젤 엔진

첫 번째 공개 실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실린더 안의 압력을 잘못 계산해 그만 엔진이 터져버리고 만 것이죠. 디젤은 이때 눈을 다쳐 시력을 일부 잃기도 했어요. 그래도 디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뒤, 디젤은 마침내 새로운 엔진의 개발에 성공합니다. 당시 주로 쓰이던 오토 엔진보다 두 배 이상 높은 효율을 자랑했죠. 루돌프 디젤은 그의 혁신적인 발명품과 함께 단숨에 스타 기술자가 됐습니다.

디젤은 '왜' 사라졌을까?

디젤이 사라진 것은 9월 30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영국 여객선 드레스덴에 탑승한 상태였죠. 첫 발견자는 디젤과 함께 영국에 통합 디젤 엔진 회사를 세운 조르주 카렐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카렐은 즉시 드레스덴의 선장을 찾아가 디젤의 실종을 알렸습니다. 즉시 배를 멈추고 배의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디젤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죠.

그리고 약 2주 뒤인 10월 11일, 네덜란드 여객선 코어첸의 선원들이 남자 시체 한 구를 건졌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선원들은 귀중품을 회수했지만 악천후에다가 부패가 심해서 시체를 다시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코어첸의 다음 기항지로 불려 온 디젤의 막내아들 오이겐은 선원들이 회수한 물건이 모두 디젤의 것이라는 걸 확인했죠.

1898년 뮌헨 엔진 페어에서 디젤의 모습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처럼 보였습니다. 암살, 실족, 자살이었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암살이었습니다. 빌헬름 2세, 록펠러 등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인물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그가 사망한 시기,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건 그리 설득력 있는 대답은 아니었어요. 다음 가능성인 실족은 더 말이 안 됐습니다. 그가 전날 크게 취한 것도 아니었고, 배의 후갑판 높이가 그리 높은 것도 아니었죠. 심지어 그날 바다도 잠잠했고요. 결국 사람들은 그의 사망을 ‘자살’로 결론내렸죠.

디젤은 정말 ‘자살’했을까?

그렇다면 디젤은 정말 자살했을까요? 글쎄요. 사실은 제가 앞에 열거하지 않은 가능성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디젤이 영국 정부의 도움을 얻어 영국으로 비밀리에 이주했을 가능성이죠. 1899년부터 영국 해군은 비밀리에 잠수함 전력화를 추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엔진 문제로 제대로 생산조차 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시간은 기약 없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1915년 8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의 베들레헴철강이 만든 부품을 캐나다로 보내 그곳의 비커스가 극비리에 생산한 15척의 잠수함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잠수함의 엔진은 바로 디젤 엔진이었죠. 캐나다에서 생산된 잠수함은 높은 엔지니어링 완성도로 영국 잠수함 부대 장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선 1915년 1월 1일, 영국 해군부는 캐나다 비커스의 기존 인력을 모두 내보내고 못 보던 인력을 배치했습니다. 철조망과 군대가 지키는 그곳을 들어가려면 별도의 출입증이 필요했죠. 무슨 말이냐고요? 아직 긴가민가하다면 두 가지 사실만 더 살펴보도록 하죠.

루돌프 디젤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첫 번째 사실은 커먼 레일 시스템입니다. 커먼 레일은 말 그대로 모든 실린더가 연결된 공통의 관에서 연료를 분사하는 걸 가리킵니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비커스가 출원한 연료 분사 특허들은 1916년 세계 최초의 커먼 레일 디젤 엔진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1925년 비커스의 디젤 엔진 책임자 윌리엄 래비지는 이걸 개발한 사람이 “맥케크니가 아닌 건 물론이고 무명의 영국 해군 마술사”였다고 논문에 썼죠.

두 번째 사실은 작전 민스미트입니다. 1943년 영국은 시칠리아가 아닌 그리스를 공격할 것처럼 독일을 속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리스 침공 계획을 담은 서류 가방을 스페인 해변에서 발견되도록 했죠.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서류 가방을 가상의 영국 해병대 소령으로 조작된 시체의 코트 벨트에 사슬로 연결했습니다. 시체의 옷에는 가상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별의별 물건들을 넣어두었습니다. 디젤이 사라졌을 때, 해군부 1등 귀족이었던 처칠은 그때 당시 영국 총리였죠.


역사를 통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비결'을 살피는 책, <확률의 승부사들>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제작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