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잃어버린 음악을 찾아 드립니다!
[김효진의 팝, 그 빛과 그늘]
잃어버린 음악 '프랑스의 샹송'
항상 듣지만 제대로 못들은 '고엽'
"Paroles" 알랭 들롱의 바람둥이 가사
'남과 여' 영화 장면마다 여백의 음률
지금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예전의 우리는, 같은 음악을 오래 반복해 들었다.
라디오와 음악다방이 음악의 유일한 창구인 시절이었다. 기껏해야 채널을, 혹은 디제이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고,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정해진 공식처럼 반복되는 선곡을 의문 없이 수긍했다.
해마다 '방학 특집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선'을 들었지만, 아주아주 오랫동안 1위는 비틀스의 'Yesterday'였다. 다들 그러려니 했고, 뻔한 레퍼토리에도 매번 설레었다.
그렇게 우리는 착한 낭만의 시대를 지났다.
선택에 수동적이었으니, 노래들의 이름도 잘 몰랐다. 기억해두지 않아도 알아서 흘러나왔고, 가을의 음악들은 늘 쓸쓸했으며 여름은 상큼했다. 문득 생각하곤 한다. 그때의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Yesterday'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인의 팝송'은 여전히 소환되지만 어느샌가 사라져버린 장르가 있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옛 추억이 되었다는 '샹송(chanson)'. 그때 무심히 들었고 어느샌가 잊힌 어려운 이름들을 찾아드리려 한다. 들으면 알지만 오래 잊고 살았던 그런 이야기들.
가을의 송가
속삭일 때의 불어는 쓸쓸하다. 영어와 달리 한마디도 모르겠는 미지의 발음들은 육박해 오지 않고 스쳐가버린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흘러나오던 '고엽'은 그래서 'Autumn leaves' 보다 'Les feuilles mortes'일 때 더 그윽하다.
<Les feuilles mortes>
yves montand
<Les feuilles mortes>
'오 그대가 기억해 주었으면
우리가 친구였던 행복한 나날들을
그때는 삶이란 게 더 아름다웠지
그리고 그때의 태양은 지금 보다 더욱 뜨겁게 타올랐었다네'
이전 글에서도 다룬 바 있지만 이 가사는 프랑스의 시인 자끄 프레베르(Jacques Prevert)가 썼고 프랑스의 국민가수 이브 몽땅(Yves Montand)이 불렀다.
잊었던 노래를 찾아드린다 해놓고 참으로 선곡이 빤하다. 실은 그 너무 빤함 때문에, 코믹하게 소환되기도 하며 늘 흘려들었고 제대로 몰입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은 이유에서다.
이즈음의 정서와는 살짝 결이 다른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팝과 재즈 신에서 계속 재생산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번스, 짐 홀, 에릭 클랩튼, 그 어느 버전을 꺼내어 들어도 아름답다. 좋은 곡이다. 가을에 더욱.
<Les feuilles mortes>
Cannonball Addrley, Miles Davis
달콤한 속삭임
얼마 전 알랭 들롱(Alain Delon)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이 '아름다운 남자'의 젊었던 모습을 그리며 몇몇 이들은 어떤 노래를 떠올렸다.
이집트 출신 여가수 다리다와 함께 한 '달콤한 속삭임'.
우리가 '빠로레 빠로레'로 알고 있는 이 단어의 프랑스 발음은 사실 '빠홀 빠홀'에 가깝다. 다리다(Dalida)가 프랑스인이 아니라 그렇게 발음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원곡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사실 다리다-알랭 들롱 버전보다 한 해 전(1972년)에 이탈리아에서 먼저 발표된 곡이다.
이탈리아 버전과 달리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는 알랭 들롱의 노련함과 얼굴(?)이 이 노래를 더 매혹적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빠홀은 '말'이란 뜻이다. 그런데 왜 달콤한 속삭임으로 번안되었을까? 'Paroles Paroes'는 가사의 의미를 알고 들을 때 더 재밌다.
dalida & Alain Delon
당신은 나의 과거이고 미래야. 나의 유일한 진실.
내가 계속 읽어야 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당신은 바이올린을 노래하게 하는 바람 같아.
부탁이야. 한마디만 하게 해줘.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그런데 그 선수가 알랭들롱!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흔들릴 판인데 이런 속삭임이라니. 그러나 다리다는 계속 빈정거린다.
당신은 말뿐이야.
그런 달콤함에 넘어가는 여자들한테나 가서 떠들라고.
또 시작이네.
당신의 그 말, 말, 말. 빠로레 빠로레 빠로레'
여유를 잃지 않는 노련함에서 다리다도 지지 않는다. 이 여인은 끝까지 마음을 주지 않았을까? 당신이라면 어땠을까? 사소하고 너무도 말캉거리지만 한 번쯤 꿈꿔봐도 좋을 달콤한 질문이다.
(Mina와 Alberto Lupo가 부른 이탈리아 원곡)
치명적인 화음
올해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별이 또 있다. 고엽의 시인 자끄 프레베르의 시에서 따온 이름, 아누크 에메(Anouk Aimee). "남과 여"의 여주인공이다.
프랑스 영화사에 의미 있는 작품들이야 셀 수 없지만, 그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 프랑스 영화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도 "남과 여"일 것이다.
대단치 않은 스토리, 알 듯 말 듯 한 표정과 긴 침묵. 영상이 시가 될 수 있구나 느끼게 해준 안개 같은 장면들. 더할 나위 없는 우아함으로 기억되는 그녀 아누크 에메,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등을 수상한 이 대단한 영화의 감독 끌로드 를르슈(Claude Lelouch)는 당시 29세였고, 후에 프랑스 영화음악계의 거장이 된 프란시스 레이(Francis Lai)에겐 데뷔작이다. 한창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나이에, 그들은 장면 장면 어떻게 이런 여백을 둘 줄 알았을까.
<Un homme et une femme>
Nicole Croisille, Pierre Barouh
분명 노래는 가수 피에르 바루와 니콜 크로이실이 부르지만, 우리는 영상 속 두 남녀의 마음으로 듣는다. 망설임과 기대, 서서히 스며드는 사랑의 설렘이 한 번만 들어도 다시는 잊을 수 없는 화음을 통해 전해져 온다.
노래를 부른 피에르 바루는 회상 신에서 여주인공 안느의 죽은 전 남편으로 잠깐 등장해 직접 노래(Samba Saravah)를 들려준다.(흥미롭게도 영화 작업 후 아누크 에메의 실제 남편이 된다) 강력한 메인 테마에 묻혀 놓쳐버리기엔 아까운 명곡이다.
'슬픔이 없는 삼바라면 그건 취하지 않는 와인이지
그저 아름답기만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
<Samba Saravah>
Pierre Barouh
예전 <주말의 영화>에서 보고 어린 내 눈에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녀의 이름을 일기장에 또박또박 적었던 기억과 함께 오랜만에 음악들을 찾아 들었다. "남과 여"는 3부작이다. 완결작인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이 아누크 에메 생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한편씩 찾아볼까 한다. 잊었던 노래들을 뒤지다 새로운 숙제가 생긴 셈인가.
내내 눅진거렸던 계절을 걷어내고 바스락바스락 가을로 걸어들어갈 즈음 이런 낭만적인 숙제라면 얼마든지.
김효진은 팝 칼럼니스트 입니다. '아직도 안 망했냐'는 말을 4년 가까이 들으며 잠실에서 LP 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시집 한 권과 여기저기 써낸 음악 에세이가 자꾸 늘어가는 무명작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