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가 엄청나다. 그야말로 미친 성적을 찍고 있다.
이정후는 시즌 첫 6경기에서 24타수 6안타(0.250)였다. 스프링캠프 중반 등에 담이 오면서 열흘 정도 빠진 여파가 있었다. 본인도 인터뷰에서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이 문제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정후는 4월6일 시애틀전에서 이번 시즌 첫 3안타 경기를 하면서 감을 회복했다. 4월9일 8경기 연속 안타 행진이 끝났지만, 이후 타격 페이스를 더 끌어올리고 있다.
이정후는 4월10일 시즌 두 번째 3안타 경기를 추가했다. 그리고 타격감이 정상궤도에 올라온 뉴욕 양키스와의 시리즈에서 1차전 시즌 첫 홈런, 3차전 멀티 홈런 경기를 선보였다. 최근 8경기 30타수 13안타, 타율이 0.433다. 13안타 중 9안타가 장타로, 같은 기간 장타율은 무려 0.967에 달한다.
압권은 양키스와의 시리즈 3차전이었다.
1,2차전에서 이정후를 막지 못한 양키스는 시리즈 마지막 경기 선발로 카를로스 로돈을 내세웠다. 2015년에 데뷔한 로돈은 메이저리그 11년차 베테랑 좌완이다. 2022년에 잠시 이정후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뛰었다. 그 해 31경기 14승8패 평균자책점 2.88의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 양키스와 6년 1억6200만 달러 계약에 성공했다.
로돈은 올해 양키스 개막전 선발 투수였다. 게릿 콜이 토미존 수술로 시즌 아웃된 양키스는 로돈에게 그 중책을 맡겼다. 그만큼 양키스가 믿고 의지하는 투수다.
로돈은 직전 디트로이트 원정에서 6이닝 6실점(5자책)으로 무너졌다. 그러다 보니 3차전에서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여기에 두 팀이 1,2차전 승리를 나눠 가지면서 3차전은 시리즈 승리를 결정하는 러버 게임(rubber game)이 됐다.
로돈은 첫 11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볼넷만 하나 내줬다(패트릭 베일리). 직전 등판 부진을 만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흐름을 깬 선수가 등장했다.
이정후였다.
이정후는 4회 두 번째 타석에서 로돈과 풀카운트 승부를 가져갔다. 로돈은 이정후를 돌려세우기 위해 결정구 슬라이더를 던졌다. 앞서 슬라이더를 밀어쳐서 라이너 타구로 만들었던 이정후는, 다소 밋밋하게 들어오는 6구째 슬라이더를 힘차게 걷어올렸다.
이 타구는 양키스타디움의 우측 담장을 그대로 넘어갔다. 타구속도 103.2마일, 비거리는 406피트. 30개 구장 중 29개 구장에서 홈런이 되는 확실한 홈런 타구였다. 한편, 이 타구가 홈런이 되지 않는 유일한 구장은 공교롭게도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 오라클파크다.
로돈의 슬라이더를 공략한 건 놀라운 일이다. 슬라이더는 오늘날 로돈을 있게 해 준 특별한 구종이다. '통산' 슬라이더 피안타율이 0.162밖에 되지 않는다. 좌타자를 상대로는 0.152로 더 떨어진다. 좌타자들이 로돈의 슬라이더에 당한 삼진율이 45%다. 이에, 로돈의 슬라이더를 홈런으로 통타한 좌타자는 이정후가 겨우 5번째다.
로돈 슬라이더 홈런 친 좌타자
2018/9/02 :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
2023/8/07 : 요르단 알바레스
2024/6/22 : 맷 올슨
2024/7/15 : 거너 헨더슨
2025/4/14 : 이정후
이정후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생각이 없었다. 두 번째 타석 홈런으로 자신감이 생겼고, 세 번째 타석도 집중력을 높였다. 불리한 카운트(0-2)로 출발했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높게 들어오는 커브(5구)를 걷어올려 또 한 번 담장 밖으로 보냈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첫 멀티 홈런 경기였다. 두 번째 홈런은 1-3 경기를 4-3으로 뒤집는 역전 스리런 홈런이었다. 이 홈런은 샌프란시스코가 리드를 그대로 지키면서 오늘 경기 결승타가 됐다. 시리즈 승패가 걸린 이 경기에서 이정후 혼자 4타점을 책임졌다. 오늘 경기를 넘어 '이번 시리즈를 지배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두 팀은 과거 뉴욕 야구의 인기를 이끌었다. 자이언츠는 맨해튼, 양키스는 브롱스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리그가 달랐기 때문에 자주 맞붙진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양키스를 만날 때마다 작아졌다.
샌프란시스코, 양키스 정규시즌 맞대결
2002 - 1승2패 열세
2007 - 2승1패 우위 *
2013 - 1승2패 열세
2016 - 1승2패 열세
2019 - 0승3패 열세
2023 - 1승2패 열세
2024 - 0승3패 열세
2025 - 2승1패 우위 *
*WS 7번 맞대결 중 우승 2회 (1921-22)
2002년부터 시작된 정규시즌 맞대결 전적은 올해 이전 6승15패였다. 1차전 승리하기 전 지난 10경기에서도 1승9패로 크게 밀렸다. 2007년 6월에 열린 3연전을 제외하면 샌프란시스코가 양키스와의 일전에서 우위를 점한 적이 없었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시켜준 선수가 바로 이정후였다. 양키스와의 3차전은 이정후만의 첫 멀티 홈런 경기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선수가 양키스를 상대로 달성한 첫 멀티 홈런 경기였다. 뉴욕 자이언츠 시절 성사된 두 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양키스전 홈런 두 방을 친 타자는 없었다. 윌리 메이스와 윌리 매코비, 배리 본즈 등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이정후가 해낸 것이다.
양키스 vs 샌프란시스코전 멀티 홈런
1923/10/12 : 베이브 루스
2024/6/01 : 애런 저지
2024/6/03 : 후안 소토
*루스는 월드시리즈 1차전
샌프란시스코 vs 양키스전 멀티 홈런
2025/4/14 : 이정후
우측 펜스가 짧은 양키스타디움은 좌타자가 분명 유리하다. 홈런의 시대를 선도한 베이브 루스도 이 구장 효과를 봤다. 양키스가 좌타자 영입에 혈안인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좌타자가 양키스타디움에서 펄펄 나는 건 아니다. 홈, 원정을 떠나서 양키스타디움은 선수에게 부담스러운 곳이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이 쓰는 구장이기 때문에, 거기서 비롯되는 묘한 긴장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키스타디움 첫 타석부터 홈런을 친 이정후는 별다른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양키스타디움에서 어떻게 타격을 해야 되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양키스타디움에 원정을 온 좌타자가 한 경기에 홈런 두 방을 친 건 작년에 한 차례 있었다. 보스턴의 라파엘 데버스였다(7월8일). 그런데 데버스는 양키스타디움을 자주 방문한다. 내셔널리그 좌타자의 양키스타디움 멀티 홈런 경기는 약 7년 만에 나온 기록이었다. 7년 전 주인공은 2018년 6월14일의 후안 소토였다.
이정후는 지난해 37경기 동안 홈런이 2개였다. 그리고 올해는 시즌 14경기 만에 지난해 홈런 수를 넘어섰다. 작년에는 홈런 하나 당 79타석이 걸렸지만, 올해는 20.3타석이 소모되고 있다. 훨씬 줄어들었다.
이정후 주요 타격 지표 (리그 순위)
홈런 : 3개 (16위)
타점 : 11개 (14위)
득점 : 16개 (3위)
도루 : 3개 (16위)
2루타 : 8개 (1위)
타율 : 0.352 (2위)
출루율 : 0.426 (7위)
장타율 : 0.704 (1위)
OPS : 1.130 (1위)
wRC+ : 214 (1위)
fWAR : 1.2 (3위)
양키스와의 3연전에서 홈런 3개를 몰아친 이정후는 타율과 출루율, 장타율 비율이 더 아름답게 바뀌었다. 현재 메이저리그 전체로 확대해도 장타율 7할대 타자는 이정후 제외 단 한 명뿐이다. 아메리칸리그의 애런 저지(0.750)다. 이 시대 최고의 타자로 불리는 저지와 리그를 양분하고 있다.
이정후가 메이저리그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것도 그냥 바람이 아니다. 초대형 태풍이다. 쉽게 사그라지지 않길 바란다.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