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남도 남해의 끝자락, 해발 488m에 달하는 설흘산과 응봉산이 바다를 향해 급격히 몸을 낮추는 곳에 경이로운 풍경이 자리합니다.
평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파른 해안 절벽에 터를 잡은 선조들은 생존을 위해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 애썼습니다.
그 결과 산비탈을 깎아 층층이 쌓아 올린 108단계의 계단식 논이 탄생했습니다. 이곳은 2005년 그 역사적 가치와 독특한 경관을 인정받아 국가 지정 명승 제15호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기계 대신 소 쟁기와 낫으로 이어가는 느림의 미학


현대적인 농기계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이곳의 시간은 다소 느리게 흐릅니다. 워낙 논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한 탓에 이앙기나 트랙터 같은 기계는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대신 100명 이상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소 쟁기질과 낫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농사를 이어갑니다.
좁고 긴 논두렁을 따라 소와 함께 밭을 가는 모습은 이제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장면입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벼와 마늘을 재배하며 살아있는 농경 문화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 방식의 경작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오롯이 계승하는 숭고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흘산 자락에서 바다로 쏟아지는 층층의 초록 물결

마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마치 초록색 파도가 바다를 향해 굽이쳐 내려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3월 말부터 4월 사이에는 다랭이 논 사이사이로 노란 유채꽃이 만개하여 푸른 남해 바다와 강렬한 색채 대비를 이룹니다.
산과 바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예술품인 논이 어우러진 모습은 방문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논의 풍경은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정성이 빚어낸 최고의 합작품입니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108단의 곡선미는 보는 각도에 따라 매번 새로운 표정을 지으며 여행자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암수바위와 공동체 신앙

논길을 따라 마을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거대한 바위 두 개가 시선을 끕니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암수바위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예부터 이 바위가 풍어와 다산을 가져다준다고 믿으며 매년 정성스럽게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신앙을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농경 문화와 어촌의 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는 마을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남파랑길 43코스를 따라 걷는 호젓한 산책과 방문 팁

이곳의 진면목을 발견하려면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마을 내부로는 차량 통행이 엄격히 제한되므로 도보 이동이 원칙입니다.
좁은 골목길과 논두렁길을 걷다 보면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소박한 풍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특히 남파랑길 43코스에 포함된 14.2km 구간의 일부로서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필수 코스로 꼽힙니다.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하며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풍경을 눈에 담아보길 권합니다.

Copyright © 여행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