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세대교체 빅뱅] 정기선 승계 밑그림 10년, 막 오른 '3세 시대' | HD현대①
HD현대그룹은 지난 30여년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돼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전면에 등장해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 같은 행보는 약 10년간 그룹 내에서 조직적으로 단계를 밟으며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남은 과제는 정 부회장의 지분승계와 이를 지원할 계열사의 배당구조 개편이다.
HD현대그룹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조기에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지난 1988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해왔다. 그간 권오갑 회장이 그룹을 이끌며 정 부회장의 경영승계를 지원했다. 정 부회장은 현재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완벽하계 승계 절차를 마무리한 것은 아니다. 아직 정 이사장이 지분구조상 최대주주로서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그룹기획실, ‘지주사 전환‧계열분리’ 정기선 승계 지원
정 부회장은 2009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고 보스턴컨설팅그룹으로 잠시 적을 옮겼다. 이후 2013년 현대중공업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재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정 부회장의 경영승계가 본격화된 시기는 2014년 말로 분석된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현대오일뱅크를 인수하면서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 및 경영쇄신을 단행했고, 그룹기획실이 새롭게 등장해 이를 이끌었다. 권오갑 현대오일뱅크 대표가 현대중공업 그룹기획실장으로 이동해 그 아래에 경영분석태스크포스팀(TFT)을 만들었다. 2015년 말에는 정 부회장이 그룹기획실 부실장으로 합류했다.
권 대표와 함께 현대오일뱅크에서 그룹기획실로 옮겨간 조영철(HD현대사이트솔루션 대표), 송명준(HD현대오일뱅크 대표), 금석호(HD현대 인사지원실장) 등은 모두 현재 계열사 요직에 올라 있다.
그룹기획실은 2016년부터 비주력 계열사 매각과 계열분리 등에 나섰다. 이를 통해 현대중공업에서 현대일렉트릭, 현대건설기계, 현대로보틱스, 현대그린에너지(현 HD현대에너지솔루션), 현대글로벌서비스(현 HD현대마린솔루션) 등 5개 회사를 계열분리했다.
HD현대그룹은 2018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지주사인 HD현대를 설립했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2019년 6월 물적분할로 현대중공업을 떼어냈다. 존속법인은 한국조선해양으로 사명을 바꿔 HD현대의 중간지주사 역할을 했다. 이밖에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사이트솔루션 등이 중간지주사다. 이를 통해 HD현대의 지배력을 강화하면 그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지분매입 ‘정공법’, 계열사 배당금 활용 실탄조달
정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공식적으로 수석부회장 직책을 달며 책임경영을 강화했다. 2023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지 1년 만이다. 그룹 내에서는 권 회장이 유일하게 회장 직책을 사용하고 있으며 정 부회장은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사촌지간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2018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2020년 회장에 올랐다. 이를 고려할 때 범현대가인 HD현대의 정 부회장 또한 이 같은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정 부회장의 그룹 내 낮은 지배력은 걸림돌이다. 정 부회장은 2018년 3월 KCC가 보유하던 HD현대 지분 83만1000주(5.10%)를 블록딜(시간외대량매매) 방식으로 취득했다. 이후 지난해까지 꾸준히 지분을 매입해 6.12%까지 확대했다. 다만 정몽준 이사장이 가진 26.6%에 비하면 아직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다.
정 부회장은 지분매입이라는 정공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정 부회장은 HD현대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 회사가 따로 없고 이미 HD현대의 그룹 개편작업도 상당 부분 마무리돼 분할이나 합병으로 지분율을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핵심계열사→HD현대→정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배당 구조가 승계 지원의 실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수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