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한명회 부관참시" 이유 조선왕조 최악의 굴욕

안녕하세요. 역시 이야기 전하는 횬세니입니다.
최근 왕과 사는 남자 영화 설연휴동안
300만을 돌파하면서 고공행진 중이에요.

단종, 엄홍도, 세조 외에도 조선왕조 권력자였던
한명회 또한 주목받고 있어요.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두 왕의 장인이었던 그가
죽어서 다시 처형당하는 부관참시를 당한 이유
지금부터 정리해볼게요!


조선왕조 실권력자, 한명회는 누군인가

1415년 12월 5일에 태어난 한명회는
7개월만에 태어난 칠삭둥이로 배와 등에
검은 사마귀가 별 모앙으로 기이하게 있던 그는
당시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73세까지 장수합니다.

친가 외가 모두 손꼽히는 명문 집안의 금수저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때 없었지만
종조부 호조참판 한상덕에게 의탁하며 자라요.

젊어 글읽기는 잘했으나 과거 운이 없던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문종 2년 38세가 되서야
음서로 관직에 들어갑니다.
(친척 및 인척에게 과거시험을 생략하고 하급 관직을 주는 관리 임용 제도)

음서로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단종 즉위 후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 마음을 사로잡아요.
1453년 계유정난을 통해 그의 오른팔이 되죠.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간파하는 등 핵심 인물이 되면서 무려 2명의 왕, 예종과 성종 장인이됩니다.

당시 수렴청정을 생각한다면 장인의 권력은
상당했는데 2번이나 장인을 했다니
그의 힘은 실로 막강하죠?

하지만 셋째 딸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둘 다 요절
넷째 딸은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
그녀는 자식없이 요절하여 외손을 얻지 못해
외척은 되지 못했답니다.

그 자리 얻기까지 청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의 말년은 다소 씁쓸하기 했으나 73세까지 장수하며 생을 마감해요.

한명회 부관참시(剖棺斬屍)최후

쪼갤 부, 널 관, 벨 참, 주검 시
이미 죽은 자의 죄상이 뒤늦게 드러난 경우 무덤에서 꺼내 극형에 내리는 걸 말해요.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부모에게 받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것 또한 효도인 것을 이 형벌은 영혼과 가문 전체를 흔들며 연좌제 성격이 강한 벌이었어요.

1504년 연산군 10년에 조선은 갑자사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에 연루된 자들을 하나씩 숙청하는 사건인데요.

이미 고인이 된 그도 피할 수 없었고, 당시 사건을 막지 않은 한명회는 충남 천안 묘소에서 꺼내져 길거리에 내걸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요.

세조를 도와 단종을 그렇게 만든 최후
자식의 삶도 좋지 못했도 자신의 마지막도
결국 인간은 자신이 치른 죄는 꼭 받고 가는 것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정치적 의미

연산군이 굳이 죽은 공신을 처벌한 것은
훈구 세력의 무력화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어요.

세조때부터 이어온 강력한 훈구파를 압박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실제로 살아있는 관료들조차 공포를 느꼈다고 해요.

또한 어머니 원한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내세워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독재 정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했죠.

이로써 한명회가 설계했던 공신 중심의 정치 구조가 결국 그가 세운 왕조의 후손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줘요.


두 명의 왕을 사위로 맞이하고
영의정을 세번이 지냈던 40년간 권력 중심에 있던
전략가 한명회!

하지만 그의 성벽은 그가 세운 왕조 후손
연산군에게 처참히 무너졌어요. 단종을 몰아내고
수많은 정적을 제거하면서 얹은 최후는
한명회 부관참시라는 타이틀이 생길만큼 처참했어요.

세월과 역사의 심판 앞에서 그의 삶은
냉정하게 평가되고 조명된 것을 보면서
인간의 욕심은 참으로 끝이 없음과 사필귀정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것 같아요.

Copyright © 횬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