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군의 딸에서 용왕의 딸이된 육지 토박이 해녀[경남 해녀열전⑦]
해녀의 뿌리는 제주도다. 현삼강(81) 해녀는 한 번도 제주도를 가본 적이 없다.
1883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인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된다. 일본어업자들은 어업침탈을 목적으로 어선에 잠수 장비를 단 잠수기 어업을 제주도로 들이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제주 해녀들이 잡을 해산물이 줄어든다. 1887년 제주 해녀들은 부산 영도를 시작으로 거제·통영·울산 등 육지로 원정 물질을 시작했다. 일부는 그대로 육지에 정착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물질을 배운 육지 토박이 해녀가 생겨났다.
현 해녀도 이렇게 육지에서 태어나 물질을 배운 이다.
◇늦깍이 해녀인 엄마 뒤를 있다 = 현 해녀에겐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미짱'이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본 무역선을 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현 해녀가 3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탄 배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현 해녀의 어머니 경비애(1921~2020) 씨는 남편의 죽음 이후 딸을 데리고 거제 이수도로 이사 왔다.
현 해녀의 어머니 경 씨는 30대 초중반부터 물질을 배웠다. 경 씨는 고향이 제주였지만, 이전까진 한 번도 물질을 해보지 않았다. 해녀들은 작업량이나 실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 중에서도 가장 물질을 잘하면 대상군, 하군 중에서도 못하면 똥군이라 불렸다. 경 씨는 물질을 가장 못하는 똥군이었다.
동료 해녀들은 똥군이라는 이유로 경 씨를 무시할 때가 잦았다. 그럴 때면 어린 현 해녀는 속이 상했다. 동시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한 번은 내가 당신들한테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
그는 12~13살쯤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않은 상태로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다른 각오 덕분인지 처음부터 다른 해녀들에게 잡은 해산물을 나눠줄 정도로 물질을 잘했다. 물에 들어가면 한참 있다가 들어간 곳과 먼 거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를 무시하던 동료 해녀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똥군 해녀 딸내미가 엄마 원수 다 갚았다."
똥군 해녀의 딸이라고 불리던 그는 물질을 시작하고 나서부턴 용왕의 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울산 원정 물질하던 세월 = 18살쯤부터는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부산 기장, 울산 장생포 등으로 원정 물질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울산 장생포에서 물질을 잊지 못했다.
현 해녀의 말을 정리하면 1960년대 울산 장생포에서의 물질은 다음과 같다. 매년 5월이면 울산 수협에서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고자 해녀들을 모집했다. 현 해녀는 당시 1000명 이상은 족히 모였다고 했다.
우뭇가사리는 한천을 만드는 주원료인데, 경제적인 가치가 높았다. 한천은 우뭇가사리로 묵을 만든 우무를 건조한 것으로, 가공식품 외에도 공업용·의약품·화장품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해녀들은 몇백 척이나 되던 수협 조합원들 배에 저마다 배정된다. 큰 배엔 15명 정도 탔고, 작은 배엔 1명만 타기도 했다. 해녀들은 돛을 세우거나, 노를 저어 바람 따라 바다로 나갔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면 해녀들은 그 신호에 맞춰 모두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수협에선 해산물의 품질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 현 해녀가 따온 우뭇가사리는 늘 1등급을 받았다.
"늘 1등을 했어.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 한번 들어가면 그냥 나오는 법이 없어."
울산에서 물질하던 현 해녀는 35살이 돼서야 거제로 돌아왔다. 이후로 쭉 거제에 정착해서 살았다.
물질 60여 년, 머릿속엔 오직 물질밖에 없었고 늘 대상군이라 불리던 실력자였다. 그랬던 그가 3년 전 은퇴했다. 지금도 여전히 물에 들어가 볼까 싶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여실히 느낀다. 하지만, 그에게 물질은 여전한 자존심이다.
"마음은 청춘이고, 몸은 늙어도 작업하고 싶지. 이기 내 자존심인 기라."
/백솔빈 기자
※ 참고문헌
민경택 '우뭇가사리 채취방식과 한천의 상품화 과정', <도서문화 56집>,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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