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경 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원장]
최근 프랑스와 미국은 모두 국가부채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다. 프랑스의 국가부채는 GDP 대비 약 112%(2024년 기준)에 이른다. 유로존의 재정 규율과 금융시장의 압박 속에서 프랑스 정부는 지출 삭감, 즉 긴축을 강행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프랑스는 법인세를 비롯한 부자 감세를 단행했다. 표면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는 이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두 가지 주류 경제학적 논리가 동시에 작동한 탓이다.
첫째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논리다. 정부가 재정을 긴축해야 시장의 신뢰를 얻고 장기금리를 낮출 수 있으며, 그 결과 민간부문의 투자와 성장이 촉진된다는 믿음이다. 둘째는 “세금을 줄여야 시장의 역동성이 살아난다”는 논리다. 기업의 세 부담을 줄여야 투자와 고용이 늘고, 더 나아가 수출 경쟁력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입 기반이 약화되었고, 긴축의 부담은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의 거리는 시위와 파업으로 들끓고 사회적 갈등은 한층 더 깊어지고 있다.
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방정부 부채는 2024년 말 기준 약 34조 달러, GDP 대비 120% 수준에 달한다. 그러나 문제는 부채의 절대 규모가 아니다. 의회가 ‘국가부채 상한(debt ceiling)’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셧다운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달러 발권력을 가진 나라가 스스로 국채 발행을 제한하는 것은 '자해적 제약'에 불과하다. 실제로 미국 국채는 전 세계 금융시장의 기초자산이자 달러 체계의 핵심 기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 경제학은 국가부채를 단순한 “부담”으로만 이해하며, 긴축과 상한이라는 자가당착의 굴레를 되풀이하고 있다.

화폐 창조 구조와 국가부채의 불가피성
성장이란 국민의 화폐소득이 늘어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국민의 화폐소득이 늘어나려면 화폐의 총량이 반드시 증가해야 한다. 현대 경제에서 화폐는 두 가지 방식으로 공급된다. 첫째는 상업은행의 대출 확대이며, 둘째는 정부의 지출 확대다. 그러나 대출 증가는 필연적으로 원리금 상환 의무를 낳아 가계와 기업의 부채 누적을 초래하며, 경기의 팽창과 수축을 반복적으로 증폭시킨다. 1929년 대공황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모두 민간 신용 팽창과 축소가 한계점에 도달한 결과였다.
따라서 안정적인 성장 경로를 위해서는 국가가 조세수입을 넘어서는 지출을 통해 추가적인 화폐를 공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채 발행은 불가피하다. 발행된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하면 새로운 본원통화가 공급되고, 이는 민간 신용 창조의 불안정을 보완하며 국민소득의 확장을 뒷받침한다. 물론 국채 발행은 국가부채를 증가시킨다. 그러나 자국 통화로 발행된 국채는 파산 위험을 수반하지 않는다. 국가는 중앙은행을 통해 언제든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 만기 국채를 상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발권력을 가진 국가의 부채는 상환 불능에 빠질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물론 국가부채를 무제한으로 확대할 수는 없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플레이션이라는 제약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는 파산 위험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경제성장률에 부합하는 범위에서 국가부채를 확대하는 것은 오히려 화폐 공급을 안정적으로 늘리고 경제의 순환을 유지하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다. 따라서 국가부채는 단순한 빚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화폐 안정의 제도적 토대라 할 수 있다.
재무부 직접 발행 화폐의 전통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국가가 반드시 국채 발행을 통해서만 화폐를 공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국채는 회계상 부채로 기록되며, 이는 정치적으로 “부채 위기”라는 담론을 낳는다. 그러나 대안은 존재한다. 바로 정부의 한 기관인 재무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해 지출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공급된 화폐는 회계상의 국가부채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독립전쟁기의 대륙 화폐(Continental Currency)가 그 사례이다. 이는 13개 식민지를 대표해 구성된 대륙회의가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직접 발행한 지폐다. 비록 전쟁 장기화와 영국의 위조 공작으로 신뢰를 잃었지만, 미국 건국기의 중요한 화폐 실험이었다. 이후 남북전쟁 시기에는 그린백(Greenback)이 등장했다. 1862년 재무부는 국채 발행 대신 직접 발권으로 전쟁비용을 조달했고, 이 지폐는 금태환이 불가능한 불환 화폐였지만 법정통화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주목할 점은 그린백이 단순한 전시 임시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United States Notes라는 이름으로 20세기까지 유통되었고, 마지막 발행분은 1976년까지도 법정통화로 기능했다. 이는 곧 “정부가 국채 없이도 화폐를 직접 창출할 수 있다”는 제도적 전통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현대적 사례: 양적완화와 발권력의 힘
역사적 전통뿐 아니라 최근의 금융위기 대응도 국가 발권력의 위력을 확인시켜주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유로존, 일본 등은 모두 양적완화(QE)라는 이름으로 중앙은행이 국채와 금융자산을 대규모로 매입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본원통화가 창출되었고,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고 자산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는 곧 국가 발권력이 필요할 때 경제를 떠받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즉, 국채 발행과 중앙은행 매입이라는 경로든, 재무부 직접 발권이라는 경로든, 핵심은 국가가 화폐를 창출할 제도적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반론
여기서 흔히 제기되는 반론이 있다. “정부가 국채를 더 발행하거나 재무부 지폐를 찍으면 인플레이션이 온다.” 그러나 역사와 이론이 보여주는 교훈은 다르다. 인플레이션은 대체로 무분별하고 경기순응적으로 확대되는 상업은행 대출이 총수요를 과도하게 밀어올릴 때 발생했다.
반면, 정부가 원칙에 따라 경기 여력을 판단하고, 생산 잠재력을 확장하는 분야에 지출을 집중하며 조세와 지출을 결합해 총수요를 관리한다면, 발권은 오히려 물가와 성장을 안정적으로 조율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요지는 분명하다. “무책임한 신용 팽창”이 물가를 흔드는 것이지, “규범에 따른 공적 발권” 자체가 반드시 인플레이션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수출 강국의 예외성과 한계
모든 나라가 국채 발행이나 재무부 화폐 발행만으로 화폐를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 수출에서 꾸준히 흑자를 내는 나라들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이를 자국 통화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화폐공급 확대 효과를 얻는다. 독일, 스웨덴, 한국, 중국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수출을 통해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해왔고, 이는 원화 유동성을 보강하는 경로가 되었다. 중국 역시 오랜 기간 대규모 무역흑자와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며 외환보유고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은행은 국내 통화정책을 운용해왔다.
그러나 수출흑자는 전 세계의 해법이 될 수 없다. 한 나라의 흑자는 다른 나라의 적자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동시에 수출흑자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수출은 일부 국가에 국한된 보완 경로일 뿐이다.
주류 경제학의 이중 모순과 한국에 주는 교훈
프랑스의 부자 감세와 긴축은 주류 경제학이 동시에 내세운 두 가지 논리-“허리띠를 졸라매야 시장 신뢰가 회복된다”, “세금을 줄여야 시장이 살아난다”-가 빚어낸 결과다. 미국은 달러 발권력을 쥐고도 국가부채 상한이라는 자해적 제약에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다. 수출 강국들은 흑자를 통해 화폐 공급을 보완하지만, 이는 일부 국가만 누릴 수 있는 예외적 경로일 뿐이다.
따라서 결론은 분명하다. 성장은 국민의 화폐소득 증가이고, 국민소득이 늘어나려면 화폐 총량이 반드시 증가해야 한다. 이 화폐의 공급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국채 발행이다. 다시 말해, 국가부채는 구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민간 신용의 불안정을 흡수하고 경제를 지탱하는 안전판이다.
문제는 주류 경제학의 시각이다. 은행이 대출을 통해 화폐를 창출하는 것은 시장의 기능으로 당연시하면서, 정작 국가가 화폐를 발행해 공공의 필요를 충족하려 할 때는 인플레이션이나 재정 위기의 원인으로 몰아간다. 이는 은행 신용창조의 불안정성과 공공 발권의 안정적 역할을 외면한 채 국가만을 제약하는 자가당착이다.
한국 역시 매년 예산 편성과정에서 국가부채 비율을 두고 논란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가부채의 절대 규모가 아니라 GDP 대비 비율이며, 이 또한 생산적 투자를 통해 충분히 관리될 수 있다. 만약 국가부채가 AI·디지털 전환, 녹색 에너지, 사회 인프라 등 미래의 생산 잠재력을 높이는 분야로 흘러간다면, 국채 발행은 부담이 아니라 성장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결국 국채 증가는 피해야 할 짐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필수 조건이다. 규모는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생산적 투자로 이어진다면 부채 비율은 성장 속에서 안정된다.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 투자가 성장률을 끌어올린다면, 국가부채는 위험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가는 기반이 된다. 주류 경제학이 진정 과학이라면, 국가부채를 단순한 위험으로 치부하지 말고 공공 발권과 재정 지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프랑스와 미국은 물론 한국 역시 긴축과 부채 공포를 넘어, 지대추구 경제에서 혁신적 성장 경제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 유승경은 경기도 경제과학진흥원 원장을 역임하며 산업정책과 혁신 생태계 조성에 힘쓴 바 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수석연구위원으로서 화폐와 금융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주립대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수학했다. LG경제연구원과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