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진남체육관의 공기는 시작부터 달궜다. 하지만 스코어는 더 차가웠다. 현대건설이 흥국생명을 3-1로 눌렀다(25-15, 18-25, 25-19, 25-16). 내용까지 보자면, 새 시즌을 앞둔 두 팀의 현재 위치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한 판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김연경 이후’ 흥국생명의 첫 발걸음이다. 요시하라 토모코 감독의 한국 무대 데뷔전이었지만, 데뷔 축포 대신 냉정한 체크리스트가 적혔다. 요시하라 감독이 말했듯, “코트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히 소통하는 팀”을 만들려면 제일 먼저 리시브와 연결이 안정되어야 한다. 이날 흥국생명은 그 첫 단추가 자주 어긋났다. 불안한 1구가 나오자 세터 손에서 공격 점프가 반 박자씩 늦고, 그러면 코스가 좁아지고, 결국 상대 블로커에게 읽히는 흐름이 반복됐다. 문지윤이 17점으로 분투했고 김다은, 김수지, 이다현이 차례로 힘을 보탰지만, ‘한 방’과 ‘연결’ 사이의 간격은 아직 컸다.
반대로 현대건설은 팀으로 이겼다. 나현수(21점)와 이예림(18점)이 양 날개에서 꾸준히 점수를 쌓았고, 김다인의 템포 조절은 경기 흐름을 안정시켰다. 양효진의 미들 트래픽과 김희진의 가담은 중앙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블로킹과 서브에서 주도권을 잡자(서브 에이스에서 6-2로 앞섰다), 전체 랠리의 속도와 높이를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컵대회 특성상 외국인·아시아쿼터가 빠진 환경에서 ‘국내 조합’만으로 얼마나 조직적인가를 묻는 시험이었는데, 현대건설은 답안을 비교적 깔끔하게 제출했다.

경기의 갈림길도 명확했다. 1세트 11-10에서 현대건설이 연속 득점으로 15-11을 만든 장면이 상징적이다. 서브로 리시브 라인을 흔들고, 전위가 네트를 압박하자 흥국생명은 쫓기듯 볼을 올려야 했다. 이때부터 현대건설은 랠리의 ‘첫 손’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2세트는 흥국생명이 반격에 성공했다. 김다솔의 투입으로 연결이 단단해졌고, 김수지의 속공과 문지윤의 강타가 리듬을 만들었다. 하지만 3세트 초반 균형이 다시 무너졌다. 현대건설은 리시브가 흔들릴 때도 김다인의 하프템포와 중앙 변화를 앞세워 시간을 벌었고, 이 시간이 이예림·나현수의 사이드 득점으로 환전되었다. 4세트는 아예 경기의 톤이 현대건설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흥국생명 입장에서 제일 크게 다가오는 단어는 ‘자리 잡기’다. 김연경은 단순한 득점원이 아니었다. 리시브의 기준점, 중요한 순서에서의 1점, 어려운 볼 처리, 코트 안 소통까지 ‘팀의 등뼈’를 맡았다. 요시하라 감독이 “전력의 반 이상을 책임지던 선수”라고 한 건 과장이 아니다. 그 공백을 한 명이 그대로 메우긴 어렵다. 대신 역할을 나눠야 한다. 아웃사이드가 리시브의 중심을 확실히 잡고, 문지윤의 공격 비중을 무리 없이 분산시키며, 미들(이다현·김수지)의 속공과 시간차로 중원을 열어야 한다. 그 핵심은 결국 첫 볼과 연결이다. 이날도 흥국생명이 2세트에서 리시브가 버티자 전체 공격 루트가 살아나지 않았나.

이다현의 합류는 분명 호재다. 다만 이 장점을 살리려면 “리시브→세터 첫 터치→미들 첫 스텝”까지의 박자가 촘촘해야 한다. 컵대회는 그 박자를 맞추는 장(場)이다. 서브 강도를 끌어올리고, 11점 인터벌 이후 첫 두 랠리에 들어갈 콜 플레이를 미리 정리해두면, 1세트의 ‘대량 실점 구간’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세터와의 약속 구간—예컨대 리시브 불안 시에도 선택할 수 있는 백속공, 퀵백, 또는 아포짓의 백어택—을 초기 메뉴로 세팅해두는 것도 필요하다. 요시하라 감독이 강조한 “코트에서 하고 싶은 것을 명확히 말하는 팀”은 결국 이런 사전 합의가 많은 팀이다.
현대건설은 무엇을 얻었나. 첫째, 측면 화력의 안정감이다. 나현수·이예림의 합작 39점은 단순한 숫자를 넘는다. 어려운 볼에서 범실을 최소화했고, 랠리가 길어질수록 더 정확해졌다. 둘째, 중앙의 무게다. 김희진이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어도 ‘자기 역할’을 정확히 수행했고, 양효진과 번갈아 상대 블로커의 시선을 묶어줬다. 셋째, 세터-리시브 라인의 질서. 리시브가 흔들릴 때 김다인의 선택은 무리하지 않는 쪽이었다. 길게 올려 버티고, 다음 랠리에서 서브로 다시 흔드는 방식. 컵대회는 ‘맞춤형’보다 ‘기본기’를 더 크게 드러낸다. 현대건설의 기본기는 견고했다.

이 경기는 컵대회의 성격도 다시 상기시킨다. 외국인·아시아쿼터 없이 국내 선수만으로 치르는 대회는 각 팀의 ‘순수한 뼈대’를 꺼내 보여준다. 흥국생명은 아직 뼈대를 새로 세우는 중이고, 현대건설은 이미 세워진 뼈대에 살을 붙이고 있다. 그러니 결과만 보면 차이가 커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시즌은 길다. 컵대회가 던지는 메시지를 정확히 듣는 팀이 정규리그에서 웃는다.
흥국생명 팬들에게는 아쉬운 오후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망만 할 일은 아니다. 이날 필요한 장면들은 분명 있었다. 2세트처럼 연결이 되면 이 팀은 충분히 강해진다. 문지윤의 ‘결’은 여전히 날카롭고, 김다은의 타이밍은 다양하며, 이다현의 존재는 상대 블로킹을 흔든다. 남은 건 반복과 합의다. 리시브 라인의 기본 스탠스, 인터벌 뒤 첫 콜, 세터와의 미리 약속된 탈출 루트. 이게 쌓이면, 김연경의 빈자리는 ‘다른 방식’으로 채워질 수 있다.

현대건설엔 과제가 없을까. 있다. 이날처럼 잘 풀릴 때는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진짜 시험은 리시브가 무너지고, 상대 서브 타깃이 정확할 때다. 그런 날에도 김다인의 선택이 지금처럼 안정적일 수 있는지, 중앙 변화를 통해 사이드를 다시 깨울 수 있는지, 나현수·이예림이 범실을 늘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 점검이 끝나면, 이 팀은 정규리그 초반을 빠르게 선점할 가능성이 크다.
결론은 간단하다. 흥국생명은 ‘새 등뼈’를 세우는 중이고, 현대건설은 ‘탄탄한 등뼈’로 한 발 먼저 나갔다. 컵대회는 성적표가 아니라 연습장이다. 흥국생명이 오늘의 메모를 잘 정리해 다음 경기에서 리시브와 연결을 고쳐 쥔다면, 요시하라호는 빠르게 달라질 수 있다. 현대건설은 지금의 기본기를 더 다듬고, 어려운 날을 위한 플랜B·C를 준비하면 된다. 여수에서 울린 첫 휘슬은 이렇게 말한다. “시즌은 이제 시작, 답은 코트 안의 작은 약속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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