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차 배우 류덕환을 다시 봤다[BreakFirst]
<브렉퍼스트>팀이 배우 류덕환(37)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는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데뷔한 지 30년 넘는 배우가 연기(演技) 대신 영화감독이나 전시 기획자 등 다양한 직업으로 활동하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관성을 깨는 것이다, 라고요. 그는 올해 8월 약 2주간 서울 성수동에서 ‘NONFUNGIBLE: 대체불가’라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전시 주제와 콘셉트도 색달랐고요.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진행하자 ‘전시 기획도 하는 배우’라고 초점을 맞추기에 그의 말과 대답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감독, 전시 기획자이기 이전에 그는 연기를 하면서도 매 순간 관성을 깨는 배우였습니다. 5세 무렵 연극 ‘벌거벗은 임금님’과 ‘뽀뽀뽀’로 데뷔, 8세 때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순길이(복길이 동생)로 출연했습니다. 19살이던 2006년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로 신인남우상을 받으며 성인 연기자로서 자리매김했고요. 류덕환은 어떤 관성을 깨는 삶을 살아왔을까요.
군대 후임이 던진 질문에 깨달은 배우의 ‘저작권’
류덕환이 최근 기획했던 전시 ‘대체불가’ 주된 콘셉트는 ‘NFA(Non-Fungible Actor)’입니다. 대체 불가능 토큰(NFT·Non-Fungible Token)에서 따와 지은 개념인데요. 네 명의 배우를 인터뷰해 영상 미디어아트를 만들고, 해당 작품의 저작권을 각 배우에게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류덕환의 문제의식은 일상 속 작은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군 복무하던 시절, 후임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류 병장님, 병장님 작품을 보려면 어디서 봐야 합니까?” 이 질문에 그의 말문이 막혔습니다. 뭐라고 대답할지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답은 ‘돈 주고 사야 볼 수 있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상식적인 개념이지만, 류덕환은 이를 한 번 비틀었습니다.
“‘내 작품인데도 결제해야 볼 수 있구나, 내가 내 작품을 마음대로 보여줄 수 있으려면 저작권이 있어야 하는구나…. 그렇다면 배우가 저작권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도달했어요.”
그렇게 전시 프로젝트 ‘에틱’이 시작됐습니다. “미술이나 음악, 무용 등 아티스트들은 행위 자체가 보호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문화재가 되기도 하는데, 배우도 ‘연기’라는 행위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어떤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서였죠. 이번 전시는 그 프로젝트의 두 번째 전시였고요.
“연기 생활을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어서 (2021년에) 결혼하고 좀 쉬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갑자기 제가 누군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저의 모든 생각들은 다 타인에게 가 있었고요. 그래서 나를 기록할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생각했고, 많은 배우가 저랑 같은 결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전시를) 추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어요.”
전시에서 관람객의 발길을 이끄는 또 다른 포인트는 ‘관객 참여 인터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미리 신청한 관람객에게는 류덕환이 준비한 질문 중 하나에 대해 카메라 앞에서 1분간 답변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었는데요. 촬영 후에는 관람객이 자신이 찍힌 영상을 QR코드를 통해 가져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최근 당신이 행복했던 기억은 언제인가요’라는 질문에 어떤 분이 20초가 지났을 때 펑펑 울기 시작하시더니 영상이 끝날 때쯤에 ‘없어요’라고 딱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그분은 촬영과 인터뷰를 다 떠나서 자신에게 몰입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진솔하고 큰 용기라고 생각했죠. 제가 이 작업을 하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는 하나의 영상이었어요.”
30년 넘게 해도 어려운 연기
30년 넘게 카메라 앞에 서봤으면 타고난 외향성을 가진 사람일 것 같은데, 어린 시절 그는 ‘엄청 숫기 없는 어린이’였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길을 가다가 어른들이 예쁘다면서 저를 만지려고 하면 막 토했대요. 그래서 어머니가 걱정돼서 저를 주변 연극학원에 보내셨는데, 너무 신기할 정도로 제가 거기서 재밌게 놀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배우가 될 운명이었을까요. 사교성을 기르기 위해 배운 연극은, 본격적인 TV 출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경기 안양시에서 개최한 연극대회에 나가게 됐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배우 유인촌 씨(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가 류덕환의 어머니에게 ‘아이에게 TV 연기를 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던 것이죠. 그 이야기가 계기가 돼 전원일기 오디션을 보게 됐고, ‘순길이’ 역(극중 복길이의 동생)을 맡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연기를 그냥 시켜서 했어요. 초등학생, 중학생이 됐을 때는 학교에 안 가서 좋았고, 촬영 현장에서는 스태프 형들이랑 노니까 재밌기도 했어요. ‘나는 좀 다르게 산다’라는 신기함 때문에 연기를 계속했던 것 같아요.”
“촬영장에서 제가 ‘덕환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나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어요. 보통 ‘야’ 아니면 ‘아역 데리고 와’라는 식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소품이랑 다를 게 없었달까요. 아역배우가 (울어야 하는 장면에서) 바로 울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어떤 아역 친구가 울지 못하니까 (감독님이) 뺨을 때리시더라고요. 그 친구가 뺨을 맞고 울기 시작하니까 ‘야 찍어 찍어!’라고 하셨고요. 너무 무서웠어요. ‘내가 어떤 일들을 해내지 못하면 큰일이구나’ 라는 압박감도 받았고요.”
누군가 시켜서, 권해서, 때로는 압박감으로 관성처럼 연기를 해오던 류덕환이 처음으로 스스로 ‘배우를 오래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무렵입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묻지마 패밀리’를 보러 가족과 함께 극장에 갔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말로 형용하기 힘든 느낌이 올라왔습니다. ‘그 기분을 한 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극장에 제 가족밖에 없었거든요. 뭔가 이상했던 것 같아요. 그 이상한 분위기를 한 번 더 느끼고 싶은데, 이런 느낌은 다시 못 느낄 걸 저는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순수함을 다시 한번 얻을 수 있는 어떤 때가 언젠가 오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희망으로 연기를 계속하는 것 같아요.”
그 후 그는 좀 더 주체적인 배우가 됐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관성을 소소하게 깨나가기 시작한 것인데요. 특히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로 첫 주연을 맡으면서, 평생 아역으로만 살던 그에게 첫 아역이 생겼을 때 그렇습니다. 아역이 마치 자신의 분신 같았습니다. 왠지 모를 사명감에, 류덕환은 자신의 촬영 일정이 없는 날에도 아역이 촬영하는 날이면 촬영장에 방문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때 19살이라 어렸거든요. 세상이 바뀌긴 했지만,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던 스태프들조차도 혹여나 아역에게는 박하게 굴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제가 겪었던 아역 시절이 무섭기도 하고 치열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배우와 관객의 관점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나는 답을 내릴 수 없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답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데 점수가 매겨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잠시 멘붕이 오기도 하죠. 그런 것들을 깨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성장을 하는 것 같아요.”
‘표현하기 위해’ 단편 영화 감독으로
전시 기획자 이전, 류덕환은 단편 영화의 감독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것들,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영상으로 남겨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단편을 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 타인의 평가를 받지 않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영화제에도 제 작품을 많이 안 냈거든요. 평가 받고 싶지 않아서요. 단편의 매력은 ‘모두 다 표현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제 본업(배우)으로 평가받는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데, 내가 그냥 해보고싶은 것, 내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해본 이 단편 영화가 평가가 되고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저를 기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류덕환은 습작도 틈틈이 썼고요. 완성시켜 둔 장편 영화 시나리오도 있습니다. 그가 전역하자마자 찍었던 단편 영화 ‘불침번’은 그가 군 생활 중 불침번을 서다가 메모해 둔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메모와 글을, 굳이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배우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어떤 표현 수단으로 ‘감독’을 선택한 사람이에요. 꼭 뭘 찍어야 한다고 압박감을 갖기 보다는, 그냥 써보고 싶어서 쓴 것이면 그것만으로 된 거 아닐까 생각하죠.”
“관성이라는 것은, 결국 어딘가에 어떤 지점이 정해져 있고, 거기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사실 그런 것들을 거부하기는 하죠. 자꾸 이상한 데로 새려고 하는 선택을 해보는 것 같아요. 안 해보면 ‘맞다’ ‘틀리다’를 제가 정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해봐야 하고, (관성의) 흐름대로 못 가는 것 같아요.”
인터뷰 말미, 의례적인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나 배역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예상외 답변이 나왔습니다.
“제가 원하는 역할을 남이 하고 있다면 너무 억울해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싫어서 안 정해요. 그냥 왜 이 역할이 왔을까 라는 신선함으로 접근하는 방법들을 더 많이 택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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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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