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이커머스 시장의 경쟁 축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쿠팡이 '로켓배송'이라는 물류 혁신으로 시장을 장악했다면, 2026년부턴 데이터 기반 초개인화와 AI 큐레이션이 생존의 조건으로 떠올랐다는 의미다. 이 변화의 중심에 G마켓이 있다. 신세계그룹과 알리바바의 합작법인으로 재편된 G마켓은 향후 3년간 AI 기술에만 3000억 원을 투자하며 '나를 가장 잘 아는 쇼핑몰'이라는 새로운 게임 규칙을 만들고 있다.
▮▮ 물류 중심에서 AI 기반 검색·추천으로 전환
지금까지 국내 이커머스 시장은 배송 속도 경쟁의 장이었다. 2014년 쿠팡의 로켓배송 서비스 출범 이후, 모든 플랫폼이 배송 인프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러한 물류 중심의 경쟁 구도는 한계에 봉착했다. 내수 시장 포화, 소비자 충성도 분산, 높은 물류 비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차별화의 축이 '얼마나 빨리 배송하느냐'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찾게 해주느냐'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G마켓의 전략 전환이 바로 이 변화를 상징한다. 제임스 장 G마켓 대표는 지난 10월 미디어데이에서 "향후 5년간 이커머스에 있을 가장 큰 변화는 AI"라고 단언했다. G마켓은 2025년 현재 연간 7000억 원을 투자하는데, 이 중 셀러 지원에 5000억 원, 고객 프로모션에 1000억 원을 투입하는 반면, 정제된 AI 기술 개발에만 1000억 원을 집중하고 있다. 단순한 할인 행사보다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정확하게 추천하는 능력에 경쟁력을 건 것이다.
개편된 G마켓 모바일 앱의 변화가 이를 증명한다. 새로운 앱은 고객의 행동 패턴, 구매 주기, 접속 시간대, 지역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각 개인에게 최적화된 상품을 우선 노출한다. 기존의 '데이터는 수집했지만 활용하지 못한'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고객마다 다른 화면을 구성하는' 단계로 진화한 것이다. 사용자가 장바구니에 담은 상품, 검색한 키워드, 페이지 체류 시간 등 모든 신호를 알고리즘이 읽어내고, 그 고객만을 위한 쇼핑 경험을 설계한다.
▮▮ 공정위 데이터 교환 금지, '기술 이식'으로 우회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G마켓이 추진하는 AI 고도화는 극한의 규제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3년 9월 신세계와 알리바바의 합작법인 설립을 승인하면서 '3년간 소비자 데이터 교환 금지'라는 조건을 부과했다. 중국 기업과의 협력으로 한국 소비자 정보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였다. 이는 사실상 G마켓이 알리바바의 방대한 고객 데이터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G마켓은 이 제약을 '기술 이식'으로 우회했다. 알리바바의 고객 데이터를 직접 받지 않는 대신, 알리바바가 축적해온 AI 인프라 자체를 도입했다. 초당 58만 건의 주문을 처리하는 고도화된 서버 기술, 수십억 건의 거래 데이터로 학습한 추천 엔진, 깊은 학습(딥러닝) 알고리즘 같은 것들이다. G마켓은 알리바바의 기술을 자신의 국내 데이터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장기적으로 독자적인 AI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 구조에는 전략적 통찰이 담겨 있다. 단기적으로는 공정위의 규제를 회피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한국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AI 모델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데이터 교환 제한이 단기적으로는 제약이지만 결과적으로 G마켓이 알리바바 기술을 소화하고 자주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멀티모달 검색', 소비자의 불분명한 욕구까지 읽어내다
2026년부터 본격화될 G마켓의 다음 단계는 더욱 야심차다. 바로 '멀티모달 검색'의 도입이다.
기존 검색 방식은 '운동화'라고 입력했을 때 운동화 전체를 보여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멀티모달 검색은 다르다. 사용자가 '부드러운 소재의 러닝화'라고 검색하면, 단순한 텍스트뿐 아니라 '부드러움'이라는 감각 정보, '소재'라는 물리적 특성까지 인식한다. 텍스트, 이미지, 음성 등 모든 형태의 비정형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해 고객이 의도한 상품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기술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진화가 아니다. 소비자가 자신의 니즈를 명확하게 언어화하지 못할 때도 AI가 그 의도를 캐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스타일 앱에서 '이 느낌의 상품 있나?'라고 물으면, AI가 이미지의 톤, 재질감, 실루엣 등을 분석해 유사한 상품을 추천하는 경험을 국내 이커머스 사용자들이 머지않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발견형 쇼핑의 시대, 구매 전환율이 새로운 경쟁 지표가 되다
G마켓의 AI 투자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경쟁 지표의 변화다. 기존 플랫폼들이 중시했던 '일일 활성 사용자(DAU)', '트래픽 증가율' 같은 지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과 G마켓 경영진은 일관되게 "단기 트래픽보다 플랫폼 효율성과 구매 전환율을 최우선하겠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을 가입시키는 것보다 '진입한 고객 한 명이 얼마나 상품을 구매하고 만족하는가'를 더 중시한다는 의미다.
이는 쿠팡의 전략과 대비된다. 쿠팡은 여전히 물류 속도와 회원 확보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으며, 2025년도 연 20% 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G마켓이 노리는 것은 다르다. 오늘 1000명을 플랫폼에 끌어들이는 것보다, 지난주 방문한 100명 중 80명이 다시 돌아와 상품을 구매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이를 '발견형 쇼핑'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고객 스스로 찾지 못했던 상품을 AI가 추천해주고, 그것이 정확하게 고객의 욕구와 맞아떨어져 구매로 이어지는 경험 말이다.
▮▮ 한국 시장은 양강 구도에서 삼국 경쟁으로 진입하는가
2024년 6월 조사에 따르면 한국 이커머스 시장은 네이버 22%, 쿠팡 20%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G마켓은 15%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2025년 한 해 동안 이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쿠팡은 20% 안팎의 고성장을 이어간 반면, 네이버의 거래액 성장은 한 자릿수에 그쳤고 3분기부터는 실적 발표에서 아예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2026년부터의 경쟁 구도는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네이버 역시 G마켓과 유사한 전략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는 2026년 내로 '대화형 AI 검색' 기능을 별도 탭으로 출시할 계획이다. 거대 언어모델(HyperCLOVA X)을 기반으로 사용자의 검색 의도를 단계적으로 분석하고, 실시간으로 순위를 재조정하는 기술이다. 또한 네이버 쇼핑의 AI 브리핑 기능은 현재 전체 검색 쿼리의 8%에 적용되어 있으며, 연내 20%까지 확대할 목표를 세웠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향후 이커머스 시장의 1위 경쟁은 단순히 거래액 규모가 아니라, '누가 더 정확하고 빠르게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AI로 추천하는가'라는 기술 경쟁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쿠팡의 물류 우위도 중요하지만, AI 추천 기술 없이는 고객 충성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 글로벌 역직구, AI 고도화의 또 다른 활용처
G마켓이 AI에 투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글로벌 시장 진출이다. 신세계-알리바바 합작법인은 G마켓의 60만 셀러들이 2000만 개의 상품을 전 세계 200개 국가에 판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한 수출 사업이 아닌 이유는, 각 국가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 특성과 선호도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일본 소비자가 원하는 한국 상품과 미국 소비자가 원하는 한국 상품은 확연히 다르다. 이때 AI 추천 시스템이 각 지역별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상품 조합을 제시한다면, G마켓의 셀러들은 훨씬 효율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AI 기술 확보가 국내 경쟁에서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생존의 관건이 된다는 의미다.
▮▮ 산업 구조 재편 앞두고 불확실성도 남아 있다
물론 과제도 적지 않다. G마켓이 실제로 주장한 만큼의 AI 성능을 구현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 구매 전환율 상승으로 이어질지는 별개의 문제다. 알리바바 기술의 '기술 이식'이 명시적 데이터 공유 없이 예상한 수준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또한 네이버와 쿠팡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네이버는 이미 AI 기술 투자를 대폭 강화했으며, 쿠팡 역시 자신의 막강한 물류 인프라를 바탕으로 소비자 데이터 축적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중국의 테무(Temu), 알리익스프레스(AliExpress) 같은 글로벌 플랫폼의 한국 진출 확대도 변수다.
▮▮ 발견과 개인화가 이커머스의 새로운 경쟁 축이 된다
결론적으로 2026년 한국 이커머스 시장은 하나의 분수령을 맞이했다. 지난 10년간 물류 속도와 배송 비용으로 경쟁했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누가 고객의 잠재적 욕구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충족시키는가'가 승패를 결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G마켓의 AI 혁신은 이 변화의 신호탄이다. 신세계 정용진 회장이 알리바바와의 합작을 통해 내건 '글로벌-로컬 마켓' 전략도, 제임스 장 대표가 강조한 '나를 잘 아는 쇼핑몰'이라는 콘셉트도, 모두 이 같은 산업 구조 재편의 의도를 담고 있다.
국내 이커머스 플랫폼들이 앞다퉈 AI 투자를 늘리고, 개인화 추천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모습도 이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보여준다. 2026년부터는 빠른 배송보다 '정확한 발견', 싼 가격보다 '맞춤형 경험'이 소비자를 사로잡는 이커머스 시장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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