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본때 보이기, 레바논·이란을 겁박하다
국제 인권단체 ‘가자 1년’ 보고서엔 이스라엘군 전쟁범죄 사례 넘쳐나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예정됐던 미국 방문을 돌연 연기했다. 미국 쪽에선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이란의 탄도미사일 공격에 맞서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 또는 원유 시설을 보복공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시점이다.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 “보복은 이해하지만,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며 사실상 핵·원유 시설 공격에 반대한 터다. 갈란트 장관의 전격적인 방미 연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중동 전역의 사위는 어둡고, 온통 불길한 기운이 가득하다.
네타냐후, 국방장관 방미 급제동
2024년 10월9일 아침(미국 시각) 바이든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1시간 남짓 통화했다고 시엔엔(CNN) 방송이 보도했다. 이날 통화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참여했단다. 두 사람 간 직접 대화는 8월21일 이후 처음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이 ‘불편함’을 느낀 탓이란 해석이 일반적이다. 실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1주년을 맞은 10월7일 바이든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 대신 실권 없는 상징적 국가원수인 이츠하크 헤르초그 대통령과 통화한 바 있다.
두 정상 간 통화가 전격 이뤄진 배경은 뭘까? 실마리는 있다. 전날인 10월8일 미국 방문을 전격 연기한 갈란트 장관이 같은 날 전쟁터 첩보 수집을 전담하는 정보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발언이다.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은 갈란트 장관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은 치명적이며, 정밀하고, 특히 예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이란은 자기들한테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스라엘 안보 체제는 전투에 나선 병사부터 총리에 이르기까지 이란 타격이란 목적에 하나가 돼 있다. 전체 지휘체계가 정비돼 있으며, 이란 타격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애초 갈란트 장관은 10월8일 밤 출국해 이튿날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날 예정이었다. 채널12 등 이스라엘 매체의 보도를 종합하면, 그의 방미를 막은 것은 네타냐후 총리다. 네타냐후 총리는 갈란트 장관의 방미와 관련해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내건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 갈란트 장관의 방미에 앞서 자신이 직접 바이든 대통령과 소통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 내각이 자신이 마련한 이란 보복공격안을 승인해야 한다. 두 조건을 종합하면 결론은 자명하다. 네타냐후 총리는 미국의 만류에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란 보복공격을 실행에 옮길 생각인 게다. 어떤 방식일까?
10월1일 이란이 이스라엘을 겨냥해 탄도미사일 180여 발을 발사한 이후 이스라엘 극우 진영에선 ‘주전론’이 들끓고 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까지 제거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네타냐후 총리보다 더 오른쪽’임을 자임하는 극우 정치인 나프탈리 베네트 전 총리는 10월8일 성명을 내어 “이란 핵 시설과 원유 시설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란 주장을 재차 내놨다. 앞서 뉴욕타임스는 10월7일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 공격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모의훈련을 시작한 것은 2021년 베네트 전 총리가 집권한 이후”라고 전했다.
이란 보복공격 합의 못한 바이든-네타냐후
“바이든 대통령이 오늘 아침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했다. 대통령은 이스라엘 안보를 지키겠다는 미국의 철통같은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겨냥한 이란의 탄도미사일 공격을 규탄했다.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만 해도 로켓과 미사일 수천 발을 발사한 헤즈볼라에 맞서 이스라엘이 자국민을 보호할 권리가 있음을 재확인했으며,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인구 밀집 지역 등에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두 정상은 가자지구와 관련해선 하마스가 억류하고 있는 인질 석방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조속히 재개해야 한다는 점도 논의했다. 대통령은 가자지구의 인도적 상황에 대해서도 논의했으며….”
백악관은 10월9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밝혔다. 미국의 기존 입장만 재확인한 셈이다. 특히 이날 통화의 핵심 의제였을 이스라엘의 이란 보복공격 방안에 대해선 언급이 전혀 없었다. 양쪽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지난 1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해 미국의 말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레바논 무장 정치세력 헤즈볼라의 최고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 사무총장 암살 사건 때는 미국에 사전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이 반대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이란 보복공격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가자지구와 같은 파괴와 고통을 당하게 될 장기적인 전쟁으로 빨려들기 전에 레바논을 구할 기회가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10월8일 성명을 내어 헤즈볼라와 계속 함께하면 레바논이 ‘제2의 가자’가 될 것이라고 레바논 국민을 겁박했다. 연일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파상 공세를 피해 이미 레바논 국민 25만여 명이 시리아 국경을 넘어 ‘난민’이 된 터다. 전날인 10월7일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네타냐후 총리가 언급한 가자지구의 ‘파괴와 고통’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난 1년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집단살해를 비롯한 심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국제사회도 이 과정에 노골적으로 가담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유럽·지중해인권감시(EMHRM)는 10월6일 펴낸 ‘탈가자: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1년과 세계질서 붕괴’란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111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에는 이 단체 가자지구 현장조사팀이 지난 12개월 동안 추적한 이스라엘군의 전쟁범죄 행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굶주림조차 군사적 전술로 활용”
먼저 이 단체는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가자지구 봉쇄 △가자지구를 의도적으로 외부와 분리해 철저히 고립시킨 점 △가자지구 주민들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체계적 침해와 박탈 △상하수도와 전력망 등 필수 기반시설 의도적 파괴 등을 ‘장기간 지속된 범죄 행위’로 규정했다. 이어 민간인 거주지와 대피시설, 피란민 캠프와 안전지대로 지정한 장소까지 공격하는 등 이스라엘이 체계적으로 집단살해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군용 차량과 탱크 등에 깔리거나, 야전에서 즉결 처형된 사례도 많았다. 시장이나 구호물품 트럭을 기다리는 장소 등 인파가 몰린 곳에서 무인기를 동원한 무차별 살상 사건도 벌어졌다. 이 단체는 이스라엘군이 “굶주림조차 군사적 전술로 활용했으며, 구금된 주민을 고의로 살해했고, 인도지원 단체 활동가와 전문직 종사자 등 팔레스타인 엘리트 계층을 표적 살해했다”고 고발했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심각한 육체·정신적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전술을 구사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민간인을 겨냥한 체계적 군사공격, 임신 가능 연령대 주민에 대한 집중 공격, 의료시설 표적 공격, 굶주림과 영양실조 유발 등 극단적인 생활조건 부과 등이 대표적이다. 인도적 구호활동에 대한 의도적 방해는 벼랑 끝으로 몰린 가자 주민의 삶을 더욱 나락으로 내몰았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전쟁 1주년을 맞아 “가자지구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쓰레기하치장으로 전락했다”고 탄식한 이유다. 네타냐후 총리가 언급한 ‘파괴와 고통’의 실체다.
전쟁 1년, 가자지구 주민들의 신산스러운 피란살이도 10월7일 1년째를 맞았다. 날마다, 순간마다,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린 1년이었다.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폭격을 피해 가족과 함께 여러 차례 사선을 넘었다. 떠나온 집이 왜 사무치게 그립지 않겠는가. 언젠간 돌아가리라는 꿈도 버릴 수 없다.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의 알아크사 병원 부근에 있는 피란민촌에서 만난 한 여성의 사연을 전했다.
파괴된 집, 열쇠만 남은 피란민의 꿈
아베르 살라비(37)는 남편과 7명의 자녀와 함께 텐트 생활을 하고 있다.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 북쪽 알카라마에 살던 살라비는 전쟁 발발 이후 5차례 피란길에 올랐다. 이스라엘군의 대피명령에 따라 도착한 첫 피란지는 중부 누세이라트였다. 거기서 최남단 라파로, 다시 칸유니스로 몸을 피했다. 지금 살라비 가족은 다섯 번째 피란지인 데이르알발라에 머물고 있다. 1년에 5차례 이사 아닌 이사를 한 셈이다.
“집이 삶이다. 내 삶이 그립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오후에 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맞이하던 일상이 그립다.” 살라비가 손에 열쇠 꾸러미를 쥐고 있다. 알카라마의 집 열쇠다. 남편과 무려 17년에 걸쳐 조금씩 천천히 지은 그의 집은 작은 정원을 갖춘 아늑한 공간이었다. 살라비는 “2023년 10월 폭격을 당해 무너지기 전까지 단 3년을 그 집에서 살았다. 남은 건 이 열쇠뿐”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꿈꾼다. 언젠가 이 무도한 전쟁이 멈추면,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는 방송에 “무너진 집터에 텐트를 치겠다. 그리고 다시 집을 짓겠다. 중요한 건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라비의 꿈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전쟁 369일째를 맞은 2024년 10월9일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4만2010명이 숨지고, 9만772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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