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만의 흑인 영웅 도리스 밀러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새길 수 있을까. 미 차기 항공모함 작명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미국이 대이란 전쟁에 투입한 제럴드 R 포드함, 에이브러햄 링컨함처럼 미 항공모함에는 역대 대통령의 이름이 붙어 왔다. 그런데 CNN은 20일(현지시간) "미 해군이 차기 포드급 항공모함(CVN-81)의 이름을 바꾸는 방안을 논의 중이며, 후보 중 하나가 '도널드 트럼프함'"이라고 보도했다. 재임 중인 대통령 이름을 항모에 붙인 전례가 없어 논란이 일고 있다.

"미 군함 작명의 법칙"
미 군함 이름을 대통령에서 따야 한다는 규정은 따로 없다. 해군 관행과 당시 해군 장관의 뜻이 더 크게 작용한다. 1819년 의회가 군함 명명 권한을 해군 장관에게 준 것이 전통의 시작이다. 현행 미 연방법에는 '두 척 이상이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해군 장관은 사들인 군함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는 두 규칙만 남아 있다.

"밀려날 진주만의 영웅"
당초 이 항모는 2차 세계대전 흑인 영웅 도리스 밀러(1919~1943)의 이름을 따 '도리스 밀러함'으로 지으려 했다. 밀러는 1941년 진주만 공습 당시 웨스트버지니아함에서 취사병으로 복무하다, 배운 적 없는 기관총을 잡고 일본 군용기를 여러 대 격추했다. 그 공로로 해군십자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함선이 어뢰에 피격되며 전사했다. 미 해군은 2020년 "흑인이자 사병 출신을 기린 최초의 항공모함"이라고 홍보한 바 있다.

"전례 없는 '현직 항모'"
대통령 이름을 붙이는 전통은 194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사후 취역한 항모부터 두드러졌다. 이후 아이젠하워, 링컨, 포드, 레이건 등이 줄줄이 이름을 올렸지만, 모두 사망했거나 퇴임한 인물이었다. 트럼프 본인도 2019년 '진주만 추모의 날'에 밀러의 공적을 치켜세운 바 있어, 그가 밀러 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길 경우 파장이 예상된다.

군함의 이름은 그 나라가 무엇을 기리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사병 출신 흑인 영웅을 지우고 현직 대통령을 새기려는 시도가 실제로 이뤄질지, 미국 안팎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사진 출처=중앙일보·다음 이미지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