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과 나는 시장 옆 이층집에서 삼십 년 동안 철물점을 했다. 아래층은 가게, 위층은 살림집이었다.
재작년 겨울, 남편이 가게 셔터를 내리다 쓰러졌다.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가게를 정리하는 일은 딸과 사위가 맡아줬다. 사위는 장례 내내 상주 자리를 지켰고, 주말마다 내려와 못 상자며 공구를 하나하나 날라줬다. 그때는 아들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사위가 줄자를 들고 이층을 쟀다
가게를 비운 지 일 년쯤 지나서였다. 사위 말투에 반말이 하나둘 섞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반찬 이거 저희 가져가요."
묻는 말이 아니었다. 냉장고를 열어 통을 꺼내 들고 가는 게 어느새 당연해졌다.
어느 일요일엔 사위가 줄자를 들고 위아래 층을 오르내렸다.
"아래층 터서 거실로 쓰면 꽤 넓겠는데요."
뭘 그렇게 재냐고 물었더니, 그냥 궁금해서라고 웃었다. 딸도 옆에서 웃기만 했다.

딸이 실수로 보낸 메시지 한 줄
그 주 목요일 밤, 휴대폰이 울렸다. 딸이었다. 그런데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빠, 엄마 집 감정가 받아봤어? 우리가 들어가 살면 엄마 설득은 내가 할게."
몇 초 뒤 메시지가 지워졌다. 이미 읽은 뒤였다.
한참 화면만 들여다봤다. 남편이 삼십 년 동안 셔터를 올리고 내린 집이었다. 그 집이 딸 입에서 감정가로 불리고 있었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내려놨다. 따져봐야 그런 뜻 아니었다는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다.

"엄마, 이제 우리랑 같이 살자"
일주일 뒤, 딸이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유난히 다정했다.
"엄마 혼자 그 큰 집에 있는 거 마음에 걸려. 우리가 들어가서 같이 살게. 아래층 고쳐서 살면 엄마도 덜 외롭잖아."
사위 일이 요즘 어렵다는 말이 뒤따랐다. 전세 만기가 다가온다는 말도.
"아니다. 같이 안 산다."
딸 목소리가 굳었다. 아빠 돌아가셨을 때 누가 가게 다 정리해줬냐고 했다. 그 고생을 이렇게 모른 척하냐고.
"그 고마움은 평생 안 잊는다. 근데 집은 안 된다."
"엄마 혼자 뭘 어떻게 살려고 그래."
"나는 나 혼자 살 거다. 너도 너희 식구랑 살아."
전화를 끊고 나서 오래 앉아 있었다. 손이 떨려서 물컵을 두 번 놓쳤다.

은행 창구에서 서명한 서류
다음 날 아침, 남편 사진을 한 번 보고 은행에 갔다.
창구 직원에게 주택연금을 신청하러 왔다고 했다. 집을 담보로 내가 죽을 때까지 매달 생활비를 받는 제도였다. 그 집은 이제 누구의 대출 담보도, 누구의 이삿짐 들어갈 자리도 될 수 없었다.
서류에 이름을 쓰면서 남편 생각이 났다. 이 집이 끝까지 나를 먹여 살린다면, 그 사람도 서운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첫 연금이 들어온 날, 텅 빈 아래층 가게 바닥을 쓸고 작은 테이블 하나를 들였다. 동네 할머니들이 오가며 앉아 쉬는 자리가 됐다.
석 달쯤 지난 토요일, 가게 문이 드르륵 열렸다. 딸이 혼자 서 있었다. 손에 귤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엄마, 그날 메시지 봤지."
"봤다."
딸이 고개를 숙였다. 한참 뒤에 작게 말했다.
"미안해. 이번엔 그냥 귤만 가져왔어."
나는 테이블 의자를 하나 빼줬다. 딸이 앉아 귤을 깠다. 남편이 쓰던 공구 벽 자리에 걸린 사진을 딸이 오래 올려다봤다. 그날 우리는 집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