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밑에서 독립 염원한 석각문 발견 

천왕봉 바위글씨 조사를 위한 분필 작업(2024. 5. 26. 촬영) /국립공원공단

국립공원공단(이사장 송형근)은 지리산의 힘을 빌어 일제를 물리치고자 하는 의병의 염원을 새긴 바위글씨(石刻)를 지리산국립공원 천왕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위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바위글씨는 권상순 의병장의 후손이 2021년도 9월에 발견하고 국립공원공단에 지난해 11월에 조사를 요청해 확인된 것이다.

천왕봉 바위글씨 조사를 위한 탁본작업(2024. 5. 3. 드론 촬영). /국립공원공단

국립공원공단 연구진은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이 바위글씨 전문을 촬영하고 탁본과 3차원 스캔 작업으로 기초조사를 펼쳤다. 조사 결과, 자연석 바위에 전체 폭 4.2m, 높이 1.9m의 크기로 392자가 새겨졌으며, 전국의 국립공원에서 확인된 근대 이전의 바위글씨(194개 추정)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발 1900m대)해 있고 글자수도 가장 많았다.

연구진은 이 바위글씨의 글자가 마모되어 전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워 자체 조사자료를 최석기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부원장과 한학자 이창호 선생에게 의뢰하여 그 내용을 판독했다.

판독 결과, 이 바위글씨는 구한말 문인 묵희(墨熙, 1875~1942)가 지은 것으로 1924년 지리산 천왕봉 밑의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확인됐다.

바위글씨를 번역한 최석기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부원장은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일제)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비분강개한 어조로 토로한 것이 석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송형근 국립공원공단이사장은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정상에서 일제에 대항한 의병과 관련된 바위글씨가 발견된 것은 국립공원 문화유산의 가치를 높여주며, 지리산 인문학과 지역학 연구에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권상순(1876~1931) 의병장은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 전후로 지리산에 들어와 의병을 조직하고 훈련을 시켰으며,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어 추후 연구 및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성인 기자

천왕봉 바위글씨 전경(2024. 2. 17. 촬영). /국립공원공단

천왕봉 각석 원문

※ 참고 : ( ) 안에 쓴 글자는 앞 글자의 正字. (?)는 앞 글자 판독이 애매한 경우

帝典曰 蠻夷猾夏 二(夏)夷之防 明矣尙矣
春秋大一統者 乃以扶陽抑陰 尊王出伯(覇) 崇華夏攘夷狄 顯忠良誅亂賊者 此也 其尊崇炪(黜)攘 不亦凜二(凜)爾乎 盖皇極刱國(?) 王才拱傳 摠若干紀峕(時) 則聖人作興 任天下而爲君師 此包羲神農黃帝 爲三皇之紀 摠先世幾年 少昊顓頊帝嚳堯舜氏 以悳相承 此之五帝之紀 摠幾歲已 夏后受舜禪 商湯續禹服 周武王伐湯業 此三王之紀 摠幾世年 漢祖眦(?)周王之隙 仍起成帝 傳幾世 而曺(?)瞞綴(?)羿莽 暫(?)竊神器 然昭烈仗義 克終 總幾年 晉武値炎興 綿歷幾年 五胡亂華 宋齊梁陳 僅保名位 摠幾年 隋一 幾年 李淵父子 自發爲唐 傳幾世年 趙宋氏康紀 亦幾年焉 諸猲嚙宋 遂遇鐵木兒 蝕之焉 大明享天 傳幾世幾年 然努(?)哈(?)赤(?)蝕之 庶(?)幾絶 嗚乎 天道 非耶 是耶 奈皇昊不振何 或將永曆之連續耶 然四海洪洞 百蠻(?)跳梁 抑何峕(時)以定耶 且无乃六万來年 斯(?)入禽獸耶 曰今天地大閤閉 機栝在何(?) 必復見獯戎狄(?)夷(?)大統 以烘(?)燿瀁(?)溢(?)之日也 然自不勝憤怨 瀝血飮泣 陟此南嶽之天王 以寫(?)万世天王之統 嘻噫 悲夫
崇禎六甲子秋七月壬子朏 罔僕遺民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

□ 번역본

서경 「제전(帝典)」(「순전(舜典)」)에 "만이(蠻夷) 만이(蠻夷) : 중국 황화문명권을 중심으로 동쪽의 오랑캐를 夷, 서쪽의 오랑캐를 戎, 남쪽의 오랑캐를 蠻, 북쪽의 오랑캐를 狄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사방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가 중하(中夏) 중하(中夏) : 중국 황하문명권을 가리킴. 中華 또는 華夏라고 한다. 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으니, 중하와 오랑캐가 사방을 경계로 한 것이 분명하고도 오래되었도다. 춘추의 대일통(大一統) 춘추의 대일통(大一統) : 공자가 魯나라 역사를 취해 微言大義를 붙여 춘추를 저술하면서 드러낸 크게 하나로 통일된 문명권을 말하는 것으로, 天命을 받은 천왕(天王:天子)이 모월을 正月로 하는 책력을 만들어 천하에 반포해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은 곧 양(陽)을 부지하고 음(陰)을 억제하며 왕도(王道)를 존숭하고 패도(覇道)를 내치는 것으로 화하(華夏:중화문명)를 숭상하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며 충량(忠良)을 현양(顯揚)하고 난적(亂賊)을 주벌(誅罰)하는 것이 그것이니, 그 중하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친 것이 또한 늠름하지 않은가.

대개 황극(皇極) 황극(皇極) : 서경 「洪範」에 보이는 말로 大中至正한 큰 표준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天王을 가리킨다.이 나라를 창업하고 왕도(王道)를 행할 재주를 가진 사람이 받들어 전하였는데, 총 얼마 동안의 기년(紀年) 기년(紀年) : 세월 또는 年歲를 가리킨다.이 지난 뒤에는 성인이 태어나 천하를 책임지고서 임금과 스승이 되었으니, 이것이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가 삼황(三皇) 삼황(三皇) : 伏羲, 神農, 黃帝를 가리킨다.의 기년이 되며 모두 상고시대의 여러 해이다. 소호씨(少昊氏)·전욱씨(顓頊氏)·제곡씨(帝嚳氏)·당요씨(唐堯氏)·우순씨(虞舜氏)가 덕으로 서로 계승하였으니, 이것이 오제(五帝)의 기년이며 모두 몇 년이다.

하후씨(夏后氏)가 순(舜)임금의 선양(禪讓)을 받았고, 상(商)나라 탕(湯)임금이 우(禹)임금의 하(夏)나라를 계승하였으며, 주무왕(周武王)이 탕임금의 상나라를 정벌하였으니, 이것이 삼왕(三王) 삼왕(三王) : 夏나라 禹王, 商나라 湯王, 周나라 文王·武王을 가리킨다.의 기년이며, 모두 몇 대 몇 년이다.

한고조(漢高祖)가 주나라 천자가 쇠미해진 틈을 엿보고서 일어나 황제가 되어 몇 세대를 전했는데, 조만(曹瞞) 조만(曹瞞) : 후한의 정승으로 삼국시대 魏나를 세운 曹操를 가리킨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이 阿瞞이었기 때문에 그를 비하하여 부른 칭호이다.이 유궁후예(有窮后羿) 유궁후예(有窮后羿) : 夏나라 때 활을 잘 쏘던 인물로 하나라 임금 相을 내치고 천자의 자리를 찬탈한 인물이다. 와 왕망(王莽) 왕망(王莽) : 前漢 말 哀帝를 폐위하고 平帝를 세웠다가 독살한 뒤 찬탈하여 新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을 이어 잠시 신성한 기물을 훔쳤다. 그러나 촉한(蜀漢) 소열황제(昭烈皇帝) 소열황제(昭烈皇帝)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劉備)를 가리킨다.가 의기를 떨쳐 잘 끝마쳤으니, 총 몇 년이다.

진무제(晉武帝) 진무제(晉武帝) : 司馬懿의 손자로 魏元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晉나라를 세운 司馬炎을 가리킨다.가 염흥(炎興)을 만나 염흥(炎興)을 만나 : 炎興은 蜀漢 後主 劉禪의 아들 劉諶의 연호로, 염흥 원년(263)에 魏나라가 대거 침입하자, 유심은 항복하지 않고 자결하였다. 여기서는 蜀漢이 망한 때를 만났다는 말로 쓰였다. 나라를 일으켜 면면이 몇 년을 이어갔다. 오호(五胡) 오호(五胡) : 晉나라 말 북방의 匈奴族·鮮卑族·羯族·氐族·羌族 등 중국 북방을 침략하여 北朝를 세운 다섯 胡族을 가리킨다.가 중화를 어지럽혀 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겨우 명맥과 지위를 보전하여 총 몇 년을 내려왔다. 隋나라가 통일하여 몇 년을 지배하였으며, 李淵 부자가 스스로 일어나 唐나라를 건국하여 여러 세대 몇 해를 전했다.

조씨(趙氏)의 송(宋)나라는 평안하게 다스려진 때가 또한 몇 년이다. 그런데 북방의 여러 오랑캐가 송나라를 침범하여 마침내 타무르(鐵木兒) 타무르(鐵木兒) : 元나를 일으킨 타무르를 가리킨다. 帖木兒, 鐵穆兒로 표기하기도 한다.를 만나 그에게 멸망 당하였다. 대명(大明:명나라)은 천명을 누려 몇 세대 몇 년을 전했으나 누르하치(努哈赤) 누르하치(努哈赤) : 淸나라를 일으킨 누르하치를 가리킨다. 奴兒哈赤, 奴兒合赤, 老乙可赤 등으로 표기한다. 에게 멸망 당하여 거의 명맥이 끊어졌다.

아! 천도가 그릇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어찌하여 황호(皇昊) 황호(皇昊) : 위대한 천왕의 권위를 가리킨다.가 떨치지 못한단 말인가. 혹 영력(永曆) 영력(永曆) : 명나라 말의 永明王(1647-1662)의 연호.이 이어지려는 것일까? 그러나 사해가 텅 비었고, 온갖 오랑캐가 발호하고 있으니, 또한 어느 때나 안정될 것인가? 장차 6만 년을 전해 온 문화가 이에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천지가 크게 닫혔다고 하는데, 다시 열리는 기미는 언제쯤일까? 오랑캐를 크게 통일하여 문명이 밝게 빛나고 넓게 퍼져가는 날을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울분과 원통함을 금치 못하고서 피를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이 남악(南嶽:지리산) 천왕봉(天王峯)에 올라 만세 천왕(天王)의 대일통을 기록한다. 아! 슬프다.

숭정(崇禎) 후 여섯 번째 갑자년(1924) 가을 7월 임자일 초하루 나라를 잃은 유민 고죽(孤竹) 묵희(墨熙) 묵희(墨熙, 1875-1942) : 老白軒 鄭載圭(1843~1911)의 문인으로, 자는 正晦, 호는 孤竹, 본관은 廣寧이다. 固城 章基(현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에 살았다.가 짓고, 화산(花山:안동) 권륜(權倫)이 쓰다.

□ 석각내용 요약

-최석기 부원장_한국선비문화연구원

이 글은 한말 경상우도의 유학자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인 묵희(墨熙, 1875~1942 )가 짓고, 권륜(權倫)이 글씨를 써서 1924년(갑자) 7월 1일(임자일)<양력 8월 1일> 지리산 천왕봉 밑의 바위에 새긴 것이다. 글자수는 모두 392자이다.

이 글의 요지는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의 대일통(大一統: 天王의 예악문물이 널리 미쳐 천하가 하나로 크게 통일되는 세상)을 주제로 하여,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日帝)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비분강개한 어조로 토로한 것이다.

이 글에는 동아시아 역대 왕조가 일어났다가 망한 것을 간추려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제가 강점한 암울한 시대는 반드시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역사를 돌아본 것이다. 또한 단순히 역사를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역대로 전한 성인의 문명,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한말의 유학자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천왕으로 여기면서 '성인이 다스리는 문명국'이라는 자존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 묵희(墨熙) 소개

○ 묵희(墨熙, 1875~1942) 선생은 자는 정회(正晦), 호는 구절산인(九節山人), 경산(敬山), 묵근자로 불렀다.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군진마을)에서 태어나 1900년대 초 문장력과 서예가 뛰어난 인물로 선생의 유문(遺文)이 일본에까지 전해져 소장되고 있으며, 일명 묵근자(墨根子), 구절산인(九節山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 190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구만면 이회서당에 보관중인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 10폭 병풍과 육경일금(六經一琴) 편액작품 1937년 4월 25일자 매일신보의 제자(題字)『광풍제월(光風霽月)』등 3점이 확인되었으며, 최근 고성지역에서도 묵희(묵근자)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1937년 당시 매일신보에 선생의 글씨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인정받은 명필가였다.

- 현재 이회서당에 보관중인 선생의 대표작인『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초서체 친필 10폭 병풍 작품은 신암 허격 선생의 부친인 성재 허홍 선생과 묵희 선생이 젊은 시절 교류하며 성재 선생의 자택을 방문해 쓴 작품으로 전해지며 그 시기는 1900~1910년대로 추정된다.

- 진주시 정촌면 안락암(安樂庵)이란 동굴에 기거하면서 아랫마을 만석군인 구기언(具基彦, 독립운동가-유공자포창)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을 위한 양병(養兵)의 식량으로 암자가 있는 일대의 전답을 사들였으며, 묵희를 상해 임정의 연락책으로 삼았다 한다. 그렇게 활동 하던 중, 둘 다 체포돼 구씨는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고 묵희는 3년여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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