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도 아닌 학생들이 ''20만 명 북한군을 총 한 자루로 막아낸'' 학도병들

영화 포화속으로

1950년 8월, 11시간의 기록이 남긴 기적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 낙동강 방어선의 중요한 거점인 포항 여중 앞 벌판에서, 고작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 12사단과 7669부대 연대 병력의 맹공을 막아선 역사가 시작됐다.

학도병들은 군복도, 계급장도 없이 교복 차림으로 학교 울타리에 자리 잡고, 단 총 한 자루와 약 250발의 실탄으로 11시간 30분 동안 농익은 병력과 장갑차, 기관총에 맞섰다.

이들의 결연한 저항은 국군 제3사단과 포항 주민 20만여 명, 민간인의 대피와 후방 지휘소 철수에 골든타임을 제공했으며, 단순한 학도병의 저항이 아닌 전국적 영웅 행위로 남았다.

소티재 전투, 여중 전투 서막

포항 방어의 서막은 여중 전투보다 3시간 앞선 소티재 고지 전투였다. 포항 출신 학도병 중심의 독립 소대가 북한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하다 160명 중 15명만 생존했다. 이 전투는 여중 전투의 준비 시간과 사기 결집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교 울타리 뒤 최후의 방어선

03시 이전, 제3사단 후방 지휘소로 활용된 포항 여중 앞에서는 71명의 학도병이 남침을 지연시키기 위해 결사적으로 자리를 지켰다.

NATO 규모의 연대 병력과 수 차례 교전에도 굴하지 않고 네 차례 물러서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47명이 전사, 13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들의 끈질긴 저항이 군·민의 안전 철수를 가능케 했다는 점이 전승 속에 기억된다.

‘진짜 총성의 11시간’ – 백병전까지 불사

공세가 절정에 이르러 탄약이 소진되는 지경에 이르자, 학도병들은 백병전까지 벌였다. 열세한 상황에도 젊은 혈기로 마지막까지 싸운 이들은, 학교가 함락된 18시경까지도 고지를 떠나지 않았다.

이로써 포항은 북한 점령 하에 들어갔지만, 이들을 통한 철수는 이미 끝나 있었다.

희생의 무게, 그리고 살아남은 용사들

71명 중 48명이 전사했고, 13명은 생환했으며, 4명은 실종됐다. 북한군 포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포로 13명은 끝내 살아 돌아왔으며, 그중 5명은 2011년까지 생존하여 정부로부터 ‘학도병 영웅’으로 추서됐다.

국군의 공식 예우와 추모의 상징

포항 탈환 후 국군 제3사단 김석원 사단장은 학도병 시신 48구를 수습하고, 임시 가매장 후 표지판을 세웠다. 이후 전사자 위패가 안치되었으며 포항 호국학도 충의탑 등 추모비가 세워져 전국적 기억의 공간이 되었다.

영화·문화 속 기록 ‘포화 속으로’

이 전투는 2010년 영화 《포화 속으로》로 재구성되어 그 희생과 인간미를 재조명했다.

작중 학도병 71명의 용기, 우정, 희생의 드라마는 엄격한 사실 관계와 감성적 표현이 교차하며, 전쟁의 비극과 숭고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역사적 의미와 지금의 메시지

포항 여중 전투는

10대 학생이 자발적 희생으로 싸운 최초의 사례

전선 방어의 ‘시간 획득 작전’의 살아있는 교육 모델

어린이와 젊은이의 희생을 통한 국가 방위의 상징

이라는 점에서 전쟁기념관, 학교 교육, 교과서 등에 삽화로 남는다.

전장의 꽃이자 나라의 등불

1950년 그날, 교복 차림 학도병 71명의 이야기는

총칼 없는 젊은 병사들의 용기

희생이 만든 안전의 틈

국가 기억 속 영원한 불꽃

으로 지속될 것이다.

그날 단 한 자루 총으로 11시간 나라를 지킨 그들의 이름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