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에게 무시 당해 수퍼카를 만든 남자
1963년, 트랙터를 만들던 한 남자가 볼로냐 교외에 새로운 회사를 세웠습니다. 아내의 강한 반대까지 무릅쓰고 말이죠. 사실 아내의 반대에는 일면 타당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가 새로운 회사를 만들려는 이유가 실로 뜬금없었기 때문이죠. 그 이유란 바로 레이싱카의 대명사, 페라리와 경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회사의 이름은 그의 성을 딴 아우토모빌리 람보르기니였죠.
농부의 아들, 트랙터 회사를 만들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의 레나초라는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요. 다섯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난 그 역시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도우며 성장했죠. 하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농사가 아닌 농사를 도와주는 기계들이었죠. 집에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기술고등학교에 들어간 그는 졸업 후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경험을 쌓은 뒤 친구와 함께 작업장을 차렸습니다. 고작 그의 나이 18살이었죠.
인생이 마음대로만 풀릴 수는 없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버린 거죠. 징집된 그는 자동차 부대에 소속되어 온갖 차량의 정비와 수리를 도맡게 됩니다. 전쟁 기간동안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또 영국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건 람보르기니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어요. 그 덕에 이탈리아와 독일, 영국 세 나라의 최신 군용차량을 실컷 수리해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이 경험을 살려 트랙터 회사를 세웠습니다. 엔진의 원리를 꿰고 있던 덕분에 아주 매력적인 물건을 만들 수 있었어요. 시동을 걸 때만 비싼 휘발유를 쓰고, 이후에는 값싼 경유로 전환되는 엔진을 탑재한 거죠. 그는 이 사업으로 꽤 큰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수퍼카 제작을 결심한 트랙터 제작자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스포츠카 사업을 결심하게 됩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람보르기니를 무시하는 페라리의 태도였어요.
당시 페라리의 상품성은 명성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엔진의 구동력을 변속기에 전달하는 클러치의 결함이 심각했는데요. 참다못한 람보르기니는 구매한 차에 자신이 직접 개조한 클러치를 설치했고, 원래 부품을 단 차량보다 훨씬 더 좋은 성능이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람보르기니는 클러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페라리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모터스포츠계의 황제나 진배없던 페라리는 ‘고작 트랙터나 만드는 이 젊은 놈’을 단번에 내쫓아버렸죠. 이렇게 말하면서요.
트랙터는 잘 모는 모양이군. 근데 진짜 페라리는 평생 배워도 제대로 몰지도 못할 걸세.
열 받은 람보르기니는 이 사건 이후 스포츠카 사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페라리보다 성능이 뛰어난 차를 만들자’는 일념 하에 말이죠.
람보르기니가 수퍼카를 만든 '진짜' 이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열 받아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을 리 만무합니다. 자동차 사업으로 성공할 확률, 그리고 성공 시의 이익 규모를 충분히 크게 보지 않았다면 그가 스포츠카 회사를 세우는 결정을 내렸을 리 없다는 이야기이죠. 다시 말해, 그는 스포츠카 사업이 높은 수익성을 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리스크, 불확실성, 이윤》이라는 책을 통해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구분했습니다. 여기서 리스크란 확률로 표현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말해요. 공장에 불이 날 가능성 따위가 리스크의 대표적인 예이죠. 사람들은 보험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이러한 리스크를 관리합니다. 반대로 아무런 정보도 없고, 빈도 확률로 표현될 수도 없기에 앞이 깜깜한 상황을 우리는 ‘불확실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제품을 개발하거나 창업을 통해 신사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불확실성의 대표적인 예이죠. 람보르기니가 스포츠카 사업에 뛰어든 건 불확실성을 짊어진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공의 절대 원칙, 불확실성을 짊어져라!
그렇다면 우리가 람보르기니의 태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가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구분’하고, 불확실성을 짊어지는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트랙터 사업을 하다가 스포츠카 회사를 만든 사례는 람보르기니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람보르기니 이전의 수많은 사업가들이 스포츠카 사업에 도전했지만, 대부분 실패하거나 절반의 성공을 맛보는 데 그쳤죠.
사람들은 람보르기니가 스포츠카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대부분 반대했어요. 성공이 불확실해 보였으니까요. 심지어 람보르기니와 가장 가까운 그의 아내마저도 반대했죠. 하지만 그가 스포츠카 사업이 높은 수익을 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은 객관화되고 계산된 확률이 아닌 ‘주관적 판단’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감수했기에 높은 이윤을 성공의 대가로 얻을 수 있었죠.
수퍼카로 성공한 농부의 아들, 다시 농장으로 되돌아가다
람보르기니가 만든 스포츠카는 처음부터 성공을 거뒀습니다. 최초 모델인 350 GT부터 400 GT, 미우라, 카운타크까지 모두 호평 일색이었죠. 빠르고 고급스러운 데다가, 애프터서비스까지 훌륭했어요. 자동차에 문제가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정비사를 직접 손님이 있는 곳으로 보냈을 정도죠. 심지어 가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으면 비행기를 태워서라도 보냈어요.
하지만 영원한 성공은 없었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제1차 석유 파동이었어요.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지자 아랍 국가들이 보복 차원에서 원유 생산을 줄여버렸던 거죠. 기름 잡아먹는 하마인 스포츠카에 미래가 없다고 여긴 그는 염증이 났는지 모든 걸 내려놓았습니다. 1973년 트랙터 회사의 자기 주식 전체를 경쟁사에 판 데 이어, 1974년 스포츠카 회사의 남은 주식마저 다른 이에게 넘겨버렸죠. 그리고 포도원을 가꾸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평생 포도 농사를 지으며 람보르기니와 형제를 키운 자신의 부모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