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여름, 서울 용산구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저에서 열린 디너에 초청받았다. 세계 최대 사슴고기 수출국답게 식탁엔 낯선 육향에 대한 기대로 가득찼다. 마주한 고기는 놀라울 만큼 부드럽고 담백했다. 비트와 아보카도에 곁들여진 사슴고기 위로 뉴질랜드 최대 와인 산지인 말보로 지역의 소비뇽 블랑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화두는 한국 와인 시장의 변화로 옮겨갔다.
코로나19 이후 국내 와인 시장이 전반적으로 식어가고 있다는 것은 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관세청 수입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전체 와인 수입량은 전년 대비 8.9% 감소했고, 수입액 역시 9% 이상 줄었다. 레드 와인 수입 감소세는 더욱 가파르다. 2025년 들어 수입액이 15%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이날 대사관 관계자는 “뉴질랜드 와인만은 예외”라며, 한국에서 뉴질랜드 와인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2025년 7월 기준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 수입량은 전년 동월 대비 193%라는 폭발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다. 뉴질랜드는 칠레와 프랑스를 제치고 국내 화이트 와인 수입량 기준 1위 국가로 올라섰다. 뉴질랜드 와인 수출의 90%는 화이트와인, 그 중에서도 소비뇽 블랑이다. 지난해 국내 화이트 와인 수입액이 26% 성장했다는 수치를 감안하면 사실상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이 전체 화이트 와인 성장세를 이끈 것이다. 전체 와인 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 특정 품종이 이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는 것은 이례적이다.
현장의 체감은 숫자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배우 하정우가 유튜브에서 한 병에 만원짜리 소비뇽 블랑을 박스로 사다 마신다는 얘기가 화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후 편의점 GS25, 세븐일레븐 등에서 연예인 이름을 내건 소비뇽 블랑이 잇따라 출시됐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들은 어느새 레드보다 화이트를, 그중에서도 소비뇽 블랑을 고르고 있다. 한국에서 와인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1990년대 후반 이후, ‘가장 많이 마시는 와인’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무거움을 견디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다. 레드 와인의 시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은 묵직했고 탄닌이 가득했다. 집단의 힘이 성장을 이끌었고, 기업의 성장은 곧 고용 확대로 이어졌다. 야근과 조직에 대한 책임, 동료애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오랫동안 국민 와인으로 군림했던 칠레산 카베르네 소비뇽의 떫은 탄닌은 그 시절의 삶을 닮아 있었다. 당시 와인 소비의 중심은 4050 남성이었다. 이들에게 술은 위로이자 각오였다.
시대는 여전히 무겁다. 인공지능(AI) 전환은 전례 없는 불안을 키우고, 구조조정과 퇴사는 일상이 됐다. 다만 무게의 방향이 달라졌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규모에서 속도로, 지속에서 유연성으로 중심이 이동했다. 미디어는 쇼츠로 소비되고, 개인의 선택과 이동은 훨씬 빨라졌다. 송길영 작가는 최근 저서 『시대예보』에서 이 같은 흐름을 가리켜 "‘경량문명’이 도래했다"고 표현했다.
소비뇽 블랑은 새 문명의 감각을 닮았다. 청사과 향과 높은 산도, 가벼운 바디. 복잡한 설명 없이 ‘산뜻하다’는 말로 충분하다. 무게를 더해 불안을 눌러 담기보다는, 무게를 덜어내고 지금 이 순간을 경쾌하게 통과하기에 적합한 술이다. 이 와인을 소비하는 계층도 2030까지 확대돼 한층 젊어졌다.
중요한 것은 레드의 시대와 소비뇽 블랑의 시대가 단절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둘 다 불안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때는 무게를 더해 견뎠고, 지금은 무게를 덜어내며 버틴다. 방식이 달라졌을 뿐 목적은 같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끝내 나아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뇽 블랑을 마신다. 가볍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거운 시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다. 어김없이 시작된 새해, 우리 앞에 어떤 변화와 어려움이 들이닥치더라도 우리는 또 다시 그 시간을 건너갈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모습으로. 기어이 우리는 각자의 술잔 속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찾아낼 것이다.
심현희 유통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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