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불평등 님비’ 지도를 공개합니다 [편집국장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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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닌 적이 있다.
집 근처 공원에 '숲속 놀이터' 조성이 예정돼 있었다.
어쩌다 총대를 메어 주민 130여 명에게서 '숲속 놀이터 찬성' 서명을 받았다.
'결사반대' 주민 몇 명의 뜻대로 숲속 놀이터는 결국 동네 뒷산 한가운데 (진짜 아무도 찾지 않는) 숲속 깊숙이 설치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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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닌 적이 있다. 집 근처 공원에 ‘숲속 놀이터’ 조성이 예정돼 있었다. 자그마한 나무 미끄럼틀 하나, 밧줄 오르막 하나가 들어설 거라는 소식에 동네 아이들이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무산됐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알고 보니 공원 앞 아파트 주민 몇 명이 구청에 열심히 민원을 넣었단다. “내 집 앞에 애들 놀이터가 생기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시끄럽고, 다른 동네 아이들까지 몰려와 쓰레기도 버리고 조경을 훼손할 것이 뻔하다며 매일 구청 공원관리팀에 출근 도장 찍듯 항의 방문을 한다고, 담당 공무원이 전했다.
동네 학부모들이 ‘주민 다수가 환영하는 시설인데 몇 사람 반대로 엎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항의하자 공무원은 “그러면 주민분들이 직접 여론 수렴을 해서 와달라”고 청했다. 어쩌다 총대를 메어 주민 130여 명에게서 ‘숲속 놀이터 찬성’ 서명을 받았다. 아파트 입주민대표회의에도 내고 구청에도 제출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결사반대’ 주민 몇 명의 뜻대로 숲속 놀이터는 결국 동네 뒷산 한가운데 (진짜 아무도 찾지 않는) 숲속 깊숙이 설치되고 말았다. 그때 담당 공무원이 울상을 지으며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 “요새는 애들 놀이터가 혐오 시설, 기피 시설이 돼버려서 공공 부지 어디에도 조성하기가 쉽지 않아요.”
초등학교 사회 과목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던 주관식 답안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은 이제 너무 복잡하고 난해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학교에서는 현대 도시민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배웠으나 이제 ‘님비’의 대상이 되는 혐오·기피 시설의 대상과 범주조차 합리적으로 헤아리기가 힘들 지경이다. 어느 지역에서는 주민 한두 명만 반대해도 어린이 놀이터 하나 설치되기 힘든데, 어떤 곳에서는 주민 아무도 모르게 유해물질이 뿜어져 나오는 대형 산업폐기물 처리시설이 완공돼버리기도 한다. ‘Not In My Backyard’를 외칠 수 있는 정보도 권력도, 누군가는 너무 강하게 쥐어서 문제이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없어서 문제다.
이번 호 이오성 기자가 쓴 커버스토리 ‘폐기물 식민지’ 기획은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기초 자료를 바탕으로 수개월간 전국 산업폐기물 처리시설 현장을 다니며 얻어낸 전국 ‘불평등 님비’의 기록이다. 농촌지역의 석산, 산업단지, 문 닫은 골프장, 뒷산 인삼밭에서 폐일회용 주사기, 폐석면, 폐유 등이 묻히거나 태워지고 있다. 주로 도시에서 쓰던 물건들이다. 전국 각지 농촌이 산업폐기물을 둘러싼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인터랙티브 지도 웹사이트 waste.sisain.co.kr 참조).
내 집 앞에 무엇이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는 한 개인을 넘어 전체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다. 놀이터 하나 설치되기 힘든 동네를 떠나 최근 이사를 갔다. 무자녀인 동네 친구는 ‘이러니 아이를 낳기 싫다’고 했다. 악취와 분진으로 시달리는 산업폐기물 시설 인근 농촌 주민들도 하나둘 터전을 옮길 테고, 자연히 지역 소멸이 가속화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손을 놓고 있다. “저도 도리가 없네요”라며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던 구청 공무원처럼.
변진경 편집국장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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