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도둑과 신분 세습, 어떤 게 더 나쁜가: ‘안나’ (2022)

[박미숙의 새필드] ‘공정’이라는 가짜 질서를 강조하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희망 고문하는 사회에 관하여. 영국 셰필드에서 대중문화를 공부한 박미숙과 함께 채워 볼 새 필드는 드라마 ‘안나’. (⌚7분)

[안나] (2022, 쿠팡플레이)를 보고 나서 떠오르는 키워드와 질문은 이렇다.

  1. 리플리 신드롬 
  2. 욕망은 본능인가, 모방인가 
  3. 도대체 능력이란 무엇인가 
  4. 신분 도둑과 신분 세습, 무엇이 더 나쁜가 

그 희미한 생각들마저 도망치기 전에, 불완전하고 구멍투성이겠지만, 내 서툰 언어의 그물로 잡아보도록 하자.


리플리 신드롬

[안나]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리플리 증후군에 관한 드라마로 흔히 알려졌다. 거짓말에 초점을 둔다면 [안나]는 기존 드라마나 영화 속 리플리 신드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안나]는, 리플리 신드롬을 다룬 대다수 작품의 야심이 그렇듯, 그 리플리 신드롬에 걸린/빠진 환자 혹은 행위자를 둘러싼 그 당대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한다. 보이는 건 리플리 신드롬에 빠진 주인공이지만, 보여주고 싶은 건 그 신드롬에 주인공을 기어코 빠뜨리는 그 당대의 욕망 시스템, 쉽게 말해 사회적 분위기다.

[안나]의 이면에는 다소 투박하고 과장된 형태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욕망이 투영된다. 부와 명성 더 나아가 미모와 지능마저 대물림되는 사회.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아니 개천에서 용 나오면 안 될 것 같은 그 ‘선진국 대한민국’의 모습을 [안나]는 차근차근, 중간중간 막장 드라마의 과장을 섞어서, 보여준다.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1960, 르네 클레망). 주인공 이름인 ‘톰 리플리'(알랭 들롱)는 ‘리플리 신드롬’의 유래가 됐다.
이하 스포일러

드라마 속 이유미(수지 분)는 능력 있고 똑똑하지만 시장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는 가난한 집 딸이다. 중학생 유미는 엄마가 장애인이라는 것과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발레를 그만둔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친구들에게 거짓말한다. 고등학생 유미는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후 내년에는 반드시 합격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번 더 거짓말한다.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유미의 거짓말은 거짓 입학식으로 이어지고 하숙집 선배의 권유로 대학교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돌연 사망하고, 엄마는 병이 재발해 유미는 생계가 곤란해진다.

고졸 유미는 호구지책으로 여러 알바를 전전한다. 이때까지 만해도 유미는 적어도 공교육 시스템을 통한 계급 이동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 실낱같은 계급이동의 꿈이 무너진 유미는 우연히/어쩌면 필연적으로 ‘괴물’이 된다.

욕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갈 차례다. 이유미의 욕망은 ‘안나’라는 이름으로, 가짜 캐릭터로, 현실에서 오리지널이 존재하는 대상을 ‘카피’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욕망은 본능인가. 아니면 모방인가. 본능이 어쩔 수 없는 DNA의 명령이라면, 모방은 사회적인 명령(억압)이다. 우리는 욕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외모와 좋은 학벌과 자랑할 수 있는 가문을 원한다. 그것은 마치 본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을 마시고 싶은 갈증, 섹스를 하고 싶은 성욕, 잠자고 싶은 수면욕을 인간의 3대 욕망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생존과 번식에 직결되는 욕망이다.

하지만 외적 아름다움과 좋은 학벌, 자랑할 수 있는 가문은 인간의 육체적 생존, 번식과 얼마나 가까이에서 존재하는가. 물론 이제 외모와 학력과 집안은 또 다른 DNA로 우리 육체에 새겨지고 있다. 생명체는 그 생명체를 둘러싼 사회, 문화와 ‘공진화’한다. 그럼에도 그 진화는 ‘진보’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 진화는 오히려 반진보다. 배타적인 욕망의 사유화가 그렇게 견고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갈 때, 그 바깥에 존재하는, 이를테면, 이유미는 ‘안나’의 욕망을 모방한다(훔친다).

‘진짜’란 무엇인가, ‘오리지널’이란 무엇인가. 그건 그 자체로 자격인가.
“어릴 때 어른들이 나를 공주 같다고 아나스타샤라고 불렀어. 그래서 내 두 번째 이름이 줄여서 ‘안나’. 그런데 사실은 ‘안나 앤더슨’이라는 여자가 이미 죽어버린 아나스탸샤 행세를 하고 살았던 거래. 그걸 알고 나서 난 그 이름을 안 썼어. 나처럼 살아본 기분은 어땠어? 좋았어?”

‘안나’ (2022) 중 현주(진짜 ‘안나’)

이하 스포일러

청년 유미는 마침내 4대 보험이 보장되는 고급 갤러리에 취직한다. 유미는 일하는 동안 상류층 문화를 습득한다. 그는 갤러리에서 상류층 사람들이 어떻게 소비하고 어떤 대화를 하고 어떻게 과시하는지 배운다. 그리고 한편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좌절과 희망이 없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유미는 자신의 초라한 일상에 분노하고 상류층의 삶을 동경한다.

그렇게 유미는 갤러리 대표 딸 이현주(정은채 분)의 해외 명문 예술대학 졸업장과 이현주 미국 이름 ‘안나’를 훔친다. 이후 개명해 해외 유학자 출신으로 신분 세탁한 유미는 유학원 강사로 취직한다. 이후 유미는 ‘안나’라는 이름이 새겨진 대학 졸업장을 자본으로 대학 강사가 되고, 사업가와 결혼하며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얻는다.

드라마를 보면 이야기의 모든 순간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롭다. 훔친 이름과 졸업장으로 문화자본을 만들어가는 안나의 노력을 보면 마땅히 보상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절하다.

그러나 아무리 처절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명의를 훔친 것은 노력 여하와 상관 없는 사기 행각이다. 그 행위는 공식 제도와 시스템 하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다. 여기서 물어야 하는 것은 왜 유미는 안나를 욕망했는가이다. 고졸의 유미는 왜 자신의 삶에서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왜 안나를 훔쳤는가.

능력주의, 가진 자들의 사기극

현대 자본주의에서 ‘리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 박근혜 정부 시절 한 교육 관료가 유행시킨 희대의 표현을 빌리면, 그 ‘개돼지들’이 그 모방한 욕망(사회화한 욕망)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능력’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능력을 보장한다고 믿어지는 능력주의의 제도적 표상, 가령 좋은 학력이다.

영화 ‘내부자들'(2015, 우민호)에서 거대 신문사 주필 이강희(백윤식 분)는 “어차피 대중은 개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라고 기업 회장에게 말한다.

한국 사회는 어느새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사회적 계급 이동이 어려운, 점점 더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자본의 대물림, 세습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가진 자’들의 사기극이라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가난한 학생이 생계 대신 석사 과정을 밟고, 박사 학위에 도전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제 혼자서 개천 용 신화를 쓰긴 어렵다. ‘영유’부터 ‘유학’까지 그 모든 과정은 컨베이어 벨트처럼 규격화하고, 절차화한다. ‘개돼지’가 ‘우리집 대표선수’로서 일반적인 취업을 포기하고 미국 유학길을 떠나는 건 미친 짓이다. 아니 용인되지 않는다.

그런 ‘개돼지’에게 가진 자들의 시스템은 ‘공정’이라는 가짜 질서를 강조하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희망 고문한다. 하지만 그 희망, 사회화된 욕망을 좇아 성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성공(?)하더라도 수많은 기회비용과 희생을 수반한다. 누가 사기꾼인가. 공정이라는 가짜 껍데기로 자신들의 신분을 안전하게 승계하는 그 기만의 시스템이 더 악랄한 사기는 아닌가.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상류 계급과 지배 계급의 구분 짓기는 개인이 가진 특정 자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현대 사회에서 특정 자본이란 문화, 사회, 경제로 구성되는데, 그 각각의 자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제 자본은 부동산, 예금, 주식 등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다. 경제 자본은 후세의 학력 자본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본인의 학력 자본을 바꾸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교육을 통한 학벌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문화 자본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양식, 매너, 예술적 감각을 포함하기 때문에 단시간 내 돈으로 바로 획득할 수 있는 자본이 아니다.

그리고 문화 자본은 제도화된 학력 자본으로 발전하며, 학벌의 취득은 경제 자본의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즉각적인 획득은 불가능하다. 문화, 사회, 경제가 자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유는 가치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경제력으로 어릴 적부터 문화적 소양을 키운 상류 계층의 자녀 세대는 그렇지 못한 계층과 문화 격차를 만들고 이 격차는 다시 계급 구조를 견고히 한다.

사회 자본은 쉬운 말로 하자면 ‘인맥’이다. 예를 들어 영화 ‘범죄와의 전쟁’(2012, 윤종빈)에서 최익현(최민식 분) 경찰서에 끌려가며 형사들에게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으! 싸우나도 경찰서장이랑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으! 이 X새끼야 으! 다 했어 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이 있다.

이때 최익현이 이용하는 것이 사회 자본, 즉 인맥이다. 사회 자본은 가족에게만 의존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명망이 높은 집단에 속하기 위해 노력한다. 소위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명문대의 후광을 얻는 것과 동시에 같은 대학 출신인 동문과 연결된다.


신분 도둑과 신분 세습

[안나]는 그렇게 잘 만들어진 드라마는 아닐지도 모른다. [안나]에는 문득문득 주인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당을 더 천박하고 악랄하게 묘사하기도 한다(3년 동안 성실하게 일한 후 하루 동안의 휴가를 신청하자 갤러리 사장이 하는 말 따위, 물론 이런 걸 제일 잘하는 건 ‘막장 드라마’다). 하지만 드라마 [안나]가 2020년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서늘하다.

신분 도둑질과 신분 세습질,어느 쪽이 더 나쁜가. 어느 쪽이 더 악랄한가.

우리가 공평하다고 여긴 교육 시스템조차 지배 계급이 경제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 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21세기에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현실은 이 때문이다. 거대 자본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체제에서는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재력(경제 자본)이 없으면 계급 이동에 성공하기 어렵다. 1970-80년대 교육이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될 수 있는 역할을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면서 그런 계층 이동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점점 더 우리 사회는 거대한 벽으로 가로막힌 채 닫혀 간다.

경제적 약자를 위한 정책과 제도가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것들일 뿐이다. 그건 ‘개돼지’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 ‘한 인간의 꿈’을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돈이 없으면 꿈꾸는 것조차 힘들다.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학자금 대출과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이들은 시간 빈곤과 소득 빈곤에 빠지기 쉽다. 문화 자본은 학력 자본으로 전환되어 사교육, 유학, 기부금 등 다양한 상품으로 드러난다. 특히 학력 자본을 만들어 주는 상품은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학력 자본을 재생산할 수 있어 궁극적으로 계급은 안전하게 대물림된다.

의무 교육인 고등학교를 마치고 노동자로 살아도 행복할 수 있고 아파도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다면 자본을 통한 사회적 계급의 대물림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1%를 원하고, 그 1%가 모든 것을 장악한 사회라면, 그리고 그런 전근대적 ‘신분’이 현존한다면, 그 신분 자체가 잘못이라고 그 본질에 관해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빈곤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탓하고, 게으른 자신을 계발하고 스스로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도 만연한다. 그러나 어떤 잘못은 개인보다는 사회의 구조에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을 탓하는 쉬운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점점 더 두텁고 단단한 벽으로 자라 공동체를 나누는 그 현실, 그 구조를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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