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텐간 이회영 선생 글을 보고 올리는 또다른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 명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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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부자는 경주 최씨 집안이다. 신라 말의 이름난 문장가인 최치원의 후손으로, 17대손인 최진립과 그의 아들 최동량 때부터 큰 재산을 모아 28대손인 최준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쳐 무려 300여 년 동안 조선 최고의 부자로 명성을 누렸다.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도 있지만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재산과 명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최부잣집 대대로 내려오는 6가지 가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와 명성을 지켜낸 6가지 가훈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6가지 중 첫 번째는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로 이 안에는 큰 뜻이 숨겨져 있다. 조선시대는 양반사회로 신분을 유지해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최소 소과인 사마시 즉 생원과나 진사과에 급제해야 했다. 반대로 벼슬이 높아지면 권력을 탐하게 되는데, 이때 투쟁에 휘말리면 보복을 당해 가문이 몰락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을 경계하여 부와 권력을 함께 가질 수 없음을 가르쳤다.

두 번째 가훈은 ‘재물을 모으되 만 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도 있듯이 욕심을 부렸다면 최씨 집안은 더 많은 재물을 모았을 것이다. 그런데 만 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고 한 것은 그 이상의 재물을 소작인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다른 땅주인들은 수확물의 70-80퍼센트를 소작료로 받는 반면, 최부잣집에서는 50퍼센트나 그 이하로 받았다. 그래서 누가 토지를 내놓는다고 하면 앞 다투어 최부잣집에 소개해 매입을 권유했다고 한다.

세 번째 가훈은 ‘손님이 찾아오면 후하게 대접하라’이다. 조선시대에도 주막이나 객사 등의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부잣집에 들러 하룻밤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최부잣집은 조선 팔도에 소문이 자자하여 경상도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씩 들러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았다. 최부잣집은 일 년에 소작료를 쌀 3천 석쯤을 거두어들였는데, 그 중에서 1천 석은 집안 식구들의 양식으로 썼고 나머지 2천 석은 손님 접대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네 번째 가훈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이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려고 싼 값에 땅을 내놓았다. 심지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부자들은 이때가 재산을 늘리기 좋은 기회라며 헐값에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에서는 이를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며 철저히 금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재산을 늘리면 원한을 사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 가훈은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이다. 최부잣집 사람들은 근검절약 정신이 투철했다. 그래서 보릿고개 때에는 쌀밥을 지어 먹지 않았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집안 살림을 맡은 여자들에겐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배도록 철저히 교육 하였고 시집온 며느리에게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혔다.

마지막 여섯 번째 가훈은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이다. 최부잣집에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 이외에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는데 사방 백 리 안의 사람들을 고향 사람으로 보아 거두어 보살폈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 리라고 하면 동쪽으로 감포·서쪽으로 영천·남쪽으로 울산·북쪽으로 포항에 이르는 지역이다.이렇게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덕을 베풀었기에 경주 최부잣집만은 활빈당의 습격으로부터 피해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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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독립을 위해 가산을 헌납하다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진 최준은 경주 최부잣집 28대손이다. 1914년 어느 날, 그의 집에 안희제가 찾아왔다. 안희제는 만주에서 3년 동안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로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붙인 ‘백산상회’를 부산에 세웠다. 이 회사를 통해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이 필요했기에 안희제는 최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고 수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백산상회는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27년 해산 때까지 이익금의 대부분이 상하이와 만주 등지로 보내졌다. 이 일은 전적으로 안희제가 맡았다. 그 뒤 안희제는 1942년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이듬해 8월에 순국하였다.
광복 뒤 최준은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서울 경교장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김구는 최준에게 낡은 장부를 꺼내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최 선생, 그 동안 수고가 많으셨어요.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저희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3천만 동포가 최 선생의 공로를 치하하여 우러러볼 거예요. 이 장부는 상하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 준 사람들과 그 자금 내역을 기록한 명세서예요.”

 

최준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안희제에게 건넨 돈과 장부의 기록은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최준은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경교장 2층 마루로 나가 안희제의 무덤이 있는 남쪽을 향해 절을 하며 목 놓아 울었다.

 

“백산, 나를 용서해 주게. 내가 자네에게 건네준 돈의 절반이라도 상하이임시정부에 전해지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미안하네 그려.”

 

최준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안희제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대구지역에 대학교를 설립할 때 모두 기부했다. 이 대학교가 지금의 영남대학교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모든 재산은 이렇게 사회에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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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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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무역회사에서 최준에게 보낸 대차대조표(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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