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24점인데 왜 졌나? 흥국생명 ‘시스템 붕괴’가 찍힌 한 장면

연패는 숫자보다 마음을 먼저 갉아먹는다. 11연패쯤 되면 선수들은 뛰면서도 ‘또’라는 단어부터 떠올린다. 정관장은 그 지긋지긋한 터널을 끝내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상대가, 하필이면 선두권 추격으로 숨 가쁘던 흥국생명이었다는 점에서 이날 경기는 더 시끄럽게 남는다.

스코어는 3-1(25-16, 23-25, 25-23, 25-21). 보기엔 깔끔한 승리지만, 내용은 “정관장이 잘했다”와 “흥국이 무너졌다”가 동시에 찍힌 경기다. 정관장은 1세트를 너무 쉽게 가져갔고, 2세트를 내준 뒤에도 3~4세트에서 다시 집중력을 되찾았다. 반면 흥국생명은 레베카가 24점을 냈는데도, 끝내 승점은커녕 흐름 자체를 잡지 못했다.

이 경기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거다. 정관장은 공격 루트를 ‘두 갈래 이상’으로 만들었고, 흥국생명은 공격 루트가 ‘한 갈래로 좁아졌다’. 흥국은 레베카가 버티고, 나머지가 따라붙지 못하면 경기 자체가 뻣뻣해진다. 이날이 딱 그 그림이었다. 국내 선수 중 두 자릿수 득점자가 없었다는 사실이, 결과보다 더 아프게 찍힌다.

정관장 쪽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네테가 29득점으로 큰 기둥을 세웠고, 신인 박여름이 20점을 보태며 승리를 완성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20점’ 자체가 아니다. 박여름은 공격만 하고 빠지는 선수가 아니라, 수비와 연결에서 팀의 숨통을 튼 타입이었다. 박여름이 한 번 살아나면, 상대 블로킹은 자네테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 순간부터 정관장은 ‘한 방 팀’이 아니라 ‘흐름 팀’이 된다.

정관장이 1세트를 25-16으로 따냈을 때, 사실상 승부는 절반쯤 결정났다. 흥국생명은 초반 리시브가 흔들리면 세터가 급해지고, 급해지면 토스가 높아지고, 높아지면 상대 블로킹이 모인다. 그 다음은 대부분 ‘하이볼 난타’다. 요시하라 도모코 감독이 경기 후 “공격수가 때릴 수 없는 하이볼 연결이 너무 많았다”라고 말한 건,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다. 그 말 속에는 “우리가 준비한 배구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는 자책이 담겨 있다.

흥국생명 입장에선 2세트를 따냈다는 사실이 오히려 독이 됐다. 한 세트를 따내면서 “이제 잡는다”는 마음이 들었을 텐데, 3세트부터 다시 같은 구멍이 반복됐다. 사이드아웃이 막히면 서브로 흔들어야 하는데, 이날 흥국의 서브는 오히려 상대에게 찬스볼을 주는 장면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상대가 ‘잘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준 장면’이 늘어난다. 요시하라 감독이 “상대의 좋은 모습, 우리가 만들어준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 그래서 날카롭다.

정관장의 승리는 “기적”이라기보다 “패턴”이 있었다. 18일 페퍼저축은행전에서 2-3으로 졌고, 그 전에도 2-3 패배 속에서 승리 문턱을 밟아봤다. 한 번씩 ‘될 듯 말 듯’한 경기를 겪다 보면 팀이 배운다. ‘아, 여기서 한 점만 더 버티면 되겠구나.’ 그 버티는 감각이 쌓이다가, 결국 이날처럼 3~4세트에 터진다. 11연패를 끊는 팀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끊는다. 갑자기 완벽해져서가 아니라, 마지막 한 뼘을 버티는 방법을 어느 날 갑자기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관장이 갑자기 강팀이 됐다고 말하긴 이르다. 다만 이 한 경기는 분명히 “정관장도 누군가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선언이다. 특히 6라운드에 들어선 지금, 상위권 팀들은 승점 1점이 아니라 ‘흐름’이 무서운 시기다. 흥국생명은 도로공사(59점), 현대건설(56점)을 쫓아야 하는데, 53점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한 번 미끄러지면, 다음 경기에서 서둘러 만회하려다 더 꼬일 수 있다.

흥국생명에게 가장 큰 경고는 ‘세터와 연결’이다. 이나연이 흔들리면 김연수가 들어가도 분위기가 뒤집히지 않는다. 물론 세터 한 명의 문제로 돌리면 편하지만, 감독이 말한 건 “이럴 때 팀으로서 어떻게 대응할지”였다. 쉽게 말해, 위기 때 ‘정해둔 안전한 옵션’이 없다는 뜻이다. 포스트시즌에 가까워질수록 이 부분은 숨길 수가 없다. 강팀은 위기가 와도 ‘무난하게 1점 따는 레시피’가 있고, 약해지는 팀은 위기 때마다 ‘우연히 1점 따길 기다린다’.

반대로 정관장은 박여름이라는 변수를 얻었다. 신인이 20득점을 하는 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상대들이 박여름을 분석하고도 똑같이 막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만약 박여름이 공격 성공률이 약간 떨어져도, 리시브와 디그로 버티면서 팀을 살릴 수 있다면 정관장은 ‘승점 자판기’가 되지 않는다. 최하위 확정과 별개로, 6라운드 정관장은 여러 팀에게 껄끄러운 상대가 될 수 있다.

결국 이 경기의 본질은 “연패 탈출”이 아니라 “판을 흔드는 신호”다. 정관장은 자존심을 살렸고, 흥국생명은 선두권 레이스에서 한 발 멈췄다. 시즌 막판, 가장 무서운 팀은 선두가 아니라 이미 잃을 게 없어진 팀일 때가 많다. 정관장이 그 위치로 들어섰고, 흥국생명은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뼈아프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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