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보고 나니 진짜 올해 천만 관객 꿈꿔도 될 신작 한국영화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리뷰 : 박제된 역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연대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영화는 그 기록의 여백을 채우는 패자의 숨결에 주목한다.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군주로 박제된 ‘단종(이홍위)’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유배지 청령포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들과 그를 지켜보았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시선을 담아낸다.

비극의 전형성을 탈피한 '촌장' 엄흥도의 시선

기존의 단종 관련 사극들이 궁중 암투와 세조의 비정함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의 영리한 지점은 관찰자의 시점을 산골 마을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에게 두었다는 것이다.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속물적인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왕은, 권력의 상징이 아닌 그저 ‘삶의 의지를 잃은 가련한 소년’이다.

유해진은 특유의 소시민적인 생활 연기와 묵직한 진심을 오가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초반부의 해학적인 톤이 후반부의 처연한 슬픔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이 영화가 단순한 신파를 넘어 설득력을 갖게 하는 핵심 동력이다.

박지훈의 눈빛이 완성한 ‘소년 군주’의 아우라

가장 놀라운 성취는 단종 역의 박지훈이다. '약한 영웅'에서 증명했던 그의 처연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은, 왕좌를 빼앗기고 죽음을 예견한 이홍위의 복합적인 심경을 완벽하게 대변한다. 감독의 말대로 "군주로서의 성정과 소년미"가 공존하는 그의 마스크는, 관객으로 하여금 정해진 결말을 알면서도 그가 살기를 간절히 바라게 만드는 감정적 몰입을 끌어낸다.

특히 한명회(유지태 분)와의 대척점에서 보여주는 정적인 긴장감은 극의 밀도를 한층 높인다. 유지태는 절제된 악의 화신으로서 군림하며, 박지훈과의 연기 대결에서 압도적인 위압감을 선사한다.

장항준의 유쾌함과 비극의 기묘한 동거

장항준 감독은 본연의 장기인 '무해한 유머'를 극 초반 광천골 사람들의 일상에 녹여내며 사극의 무거운 공기를 환기한다. 이는 후반부 닥쳐올 비극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미술적 디테일 또한 훌륭하다. 궁궐의 화려함 대신 강원도 영월의 거친 자연과 백성들의 비루한 삶을 사실적으로 구현하여, 팩션(Faction) 사극으로서의 현실감을 확보했다.

우선적으로 '왕과 사는 남자'는 웰메이드 상업 영화로서의 미덕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서 흥행을 기대할만 하다. 자칫 과해질 수 있는 단종의 비극을 엄흥도의 시선을 통해 객관화하면서도,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탄탄한 연기 앙상블은 연출적 빈틈을 메우기에 충분하며, 개봉일인 설 연휴라는 점을 생각해 볼때 가족 관객이 함께 즐기기에 무리가 없는 유머와 감동의 적절한 배합이 돋보인다.

다만, 장르적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전형적인 신파 구조가 일부 보이며, 장항준 감독 특유의 재치가 사극이라는 외피와 만났을 때 생기는 톤의 불일치가 완벽한 만점으로 가는 발목을 잡고 말았다. 영화 초반부의 코믹한 톤이 정통 사극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 있으며, 중반부 전개 속도가 다소 정체되는 구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과 사는 남자'는 2026년 한국 사극의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리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수작이며, 유해진-박지훈의 부자(父子) 같은 케미스트리가 주는 진한 여운이 관객들에게 큰 여운을 남겨줘 아쉬운 부분도 충분히 매꿔준다. 역사가 스포일러일지라도, 그 여백을 채운 인간의 온기는 여전히 유효해 '왕과 사는 남자'는 올해 한국 영화의 기분 좋은 시작을 알릴 수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2월 4일 개봉한다.

평점:★★★☆

최재필 기자 damovie2019@gmail.com(오타 신고/제보 및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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