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햅쌀이 나왔습니다. 이렇게요."
당진 해나루쌀조합공동사업법인에서 확인한 햅쌀의 가치
지난 17일 오전 8시. 안개가 자욱한 서해안 고속도로를 뚫고 충청남도 당진시를 찾았다. 햅쌀 수매가 한창인 당진 해나루쌀조합공동사업법인(이하 해나루쌀조공법인)을 방문했다.
해나루쌀조공법인 박승석 대표(59)는 “오후 4시만 되면 갓 수확한 쌀알을 실은 트럭들이 줄을 선다”며 팔을 쭉 뻗어 저 멀리 큰 길가를 가리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영락없는 가을 들판이었다. 수확을 기다리는 벼는 가벼운 바람에도 출렁이듯 흔들렸다. 올골찬 알맹이는 머지않아 햅쌀로 재탄생할 터였다. 박 대표를 만나 2024년산 햅쌀이 우리 밥상에 오르는 여정을 들었다.
◇2024년 미곡종합처리장의 수준
당진시 송악읍에 위치한 해나루쌀조공법인은 충남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송악농협·송산농협·당진농협 등 3개의 조합이 2015년 7월 새롭게 설립한 공동사업법인이다. 쌀이 들어오고 나가는 전 과정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GAP(농산물우수관리제도) 인증을 받은 시설에서 이뤄진다. 출고 당일 도정해 소비자에게 판매하고 있다.
해나루쌀조공법인은 5600평(약 1만8512㎡) 규모로 축구장 2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다.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초록색 언덕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하루 최대 작업량을 넘어서는 물량을 외부에 적재해둔 것이다. 박 대표는 “수확 철엔 하루 만에 700t(톤)이 들어오기도 한다”며 “공정 속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3일에 걸쳐 나눠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갓 수확한 쌀은 톤백 또는 벼수매통 안에 담겨 옮겨진다. 사용 후 폐기해야 하는 톤백과 달리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벼수매통으로 바뀌는 추세다.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용량이 최대 1t에서 2t으로 늘었다. 운반할 때마다 작업자 3명이 달라붙어야 했지만, 이제는 지게차 운전사 한 명이면 충분하다.
수확 직후엔 쌀알이 수분을 머금고 있다. 건조 전 상태를 ‘물벼’라고 하는 이유다. 물벼가 담긴 벼수매통을 지게차가 번쩍 들어 우수수 쏟아부으면, 흙먼지나 큰 이물질을 걸러낸 다음 건조기로 이어진다. 해나루쌀조공법인에는 30t 용량의 건조기 10기가 있다. 건조기를 통과한 물벼는 습도 15.5%의 ‘건벼’가 된다.
‘벼’가 ‘흰 쌀’이 되려면 두 번의 도정을 거쳐야 한다. 1차 도정하면 현미, 2차 도정하면 백미가 되는 방식이다. 5t 크기의 도정 라인이 2개가 함께 돌아가면 시간당 10t을 도정할 수 있다. 8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하면 하루 80t을 도정할 수 있는 규모다. 박 대표는 “가을엔 하루 24시간 풀 가동한다”며 “18명의 직원이 번갈아 가며 야간 근무를 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농협이 햅쌀 수매를 고집하는 이유
해나루쌀조공법인에서는 삼광미·당찬진미·친들·미품 등 4가지 품종을 취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삼광미는 약 75%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병충해나 비·바람에 강할 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찰진 밥맛을 자랑한다. 당찬진미는 올해 처음 빛을 본 품종이다. 당진시에서만 재배되는 고유 품종으로 쌀알이 굵어 질감이 우수하고 건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특징이 있다.
매년 가을 수확을 마치고 나면 이듬해 재배할 벼 품종을 결정한다. 봄이 오기 전에 농가와 농협은 계약을 맺는다. 계약서에는 어떤 품종으로 몇 톤을 재배·수매할 것인지가 담긴다. 당찬진미처럼 새롭게 도입되는 품종의 경우 농협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한다. 품종별 특성이나 재배 방법에 대한 교육이다. 이후 파종과 모내기를 한 다음 농부의 정성을 보태면 그해 가을 햅쌀을 만날 수 있다. 11월에 수매가격이 결정되면 농가는 쌀값을 한꺼번에 받는다. 이러한 계약재배 방식을 ‘매취형’이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쌀을 어떻게 다룰까. 미국, 프랑스 등의 나라는 ‘수탁형’을 취하고 있다. 수확량 일체를 RPC(미곡종합처리장)에 맡기는 것까지는 동일하다. 이후 정산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매취형은 전량을 사들이고 한꺼번에 판매하는 방식이지만, 수탁형은 판매를 원하는 시점에 그 시세에 맞춰 정산하는 방식이다. 이때 농민들은 마치 주식을 팔듯 쌀을 판매하기 때문에 때론 큰 이익을 얻을 수도, 때론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농협이 수매를 고집하는 이유는 ‘안정성’에 있다. 박 대표는 “개별 농가가 소형 도정 공장에 쌀을 맡겼을 때 한 가마(80㎏)에 가공료 1만3000원, 건조료 1만원을 떼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은 13만7000원 정도”라며, “농협과 계약재배하면 수매가에 배당금, 사업준비금 등을 더해 총 10~20% 높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쌀 소비 촉진을 위한 한 걸음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당해에 난 쌀 ‘햅쌀’을 귀하게 여겼다. 햅쌀이 나면 밥을 짓거나 전통주를 빚어 조상신, 가신(家神)에게 올리는 풍속도 있다. 햅쌀은 단순히 맛이 좋은 것을 뛰어넘어 영양학적 가치도 우수하다. 국립식량과학원 곽지은 박사·연구사(50)는 “쌀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공기와의 접촉에 의해 지방 성분, 비타민 등이 쉽게 변질된다”며 “지방 산화는 쌀의 전분·단백질 성분에도 영향을 주며 밥을 지었을 때 밥알이 딱딱해지고 밥맛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K-푸드의 인기에 힘입어 해외에서도 우리나라 쌀을 찾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해나루쌀조공법인은 과거 송악농협 시절인 15년 전부터 세계 각국으로 쌀을 수출했다. 수출국은 미국, 캐나다,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선진 도정, 곡물 관리 시스템을 보고 배우기 위해 해외의 관련 담당자들이 직접 해나루쌀조공법인을 찾아오기도 한다.
한편 농협중앙회는 국내 쌀 소비 촉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학교에서는 ‘천 원의 아침밥’, 편의점에서는 ‘모두의 아침밥’, 기업체에서는 ‘근로자 아침밥’ 행사를 펼치며 아침밥 실수요를 창출했다. 오는 12월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일산 킨텍스에서는 ‘K-라이스페스타’가 열릴 예정이다. K-라이스페스타는 우리술·쌀가공식품 부문 국내 최대 규모 품평회로 농협이 주관하고 농림축산식품부가 후원하는 행사다. 페스티벌 참관을 원하는 경우 11월30일까지 공식 홈페이지에서 사전 등록이 가능하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