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노래 '귀국선', 해방의 감격과 희망 다뤄
우키시마호 침몰, 귀국동포 524명 희생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 추모 노래도 뒤늦게
갑자기 찾아온 해방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는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방송이 흘러나왔다. 느릿하고도 맥 빠진 목소리였다. 이 믿기 어려운 소식에 조선인들은 일순간 멍해졌다. 결코 망할 것 같지 않던 일본이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줄이야…. ‘오장 마쓰이 송가’ 등 일제 말기 친일시를 쓴 서정주도 해방 후 친일 행적에 대해 해명하면서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서울에서 살았던 러시아 출신의 한 외국인은 이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8월 15일, 서울은 마치 쥐 죽은 듯 고요하였다. 시민들은 일본의 항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냥 기다렸다. 기쁨과 희망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환희에 가득 찬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이 온 시내, 온 나라를 뒤덮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텅 비고 조용하기만 하였던 서울, 수많은 사람이 파도처럼 광장과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웠다. 끝없는 흰 바다가 흔들리며 들끓는 듯하였다.”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한울. 1996년)

한반도가 다시 한민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갇혀 있던 독립투사들은 풀려나고,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에 징용·징병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귀국선을 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승만·김구 등 해외의 독립운동 지도자들도 귀국을 서둘렀다.
독립투사·징병자·징용자·종군위안부 등 300만 동포가 시모노세키·상하이·다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조국을 그리며 눈물짓던 세월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부산항 제1부두, 귀국선이 돌아오다
귀항지는 부산항 제1부두. 1945년 가을 어느 날, 이 감격과 서러움·희망이 교차하는 풍경을 손로원이 노랫말로 쓰고 이재호가 멜로디를 입혀 노래로 완성했다. 이 노래가 바로 ‘귀국선’이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던가 타국살이에
몇 번을 불렀던가 고향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소리 건설은 크다
유튜브 동영상 '귀국선'. 노래 이인권
‘귀국선’은 처음엔 ‘전선야곡’으로 유명한 신세영이 취입했으나 실패했다. 대중들에게 히트를 기록한 버전은 이인권이 재취입한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른 이인권은 오케레코드의 쇼단이 청진에서 공연 중일 때 남인수의 대역을 맡아 ‘청진의 남인수’로 소개되면서 가수가 되었다.
이인권은 태평양 전쟁 중에는 군국가요를 부르기도 했으며, 6·25전쟁 중에 가수인 부인과 함께 국군 위문공연을 펼치다가 부인이 포탄에 맞아 죽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이때의 아픔을 형상화한 자작곡 ‘미사의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인권은 1950년대 이후로는 노래보다 작곡 분야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현인의 ‘꿈이여 다시 한번’, 송민도의 ‘카츄샤의 노래’, 최무룡의 ‘외나무다리’, 이미자의 ‘들국화’,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나훈아의 ‘후회’ 등이 유명하다. ‘트로트 여왕’ 주현미가 중학생일 때 이인권에게 노래 지도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비극
노래 ‘귀국선’은 해방의 감격과 희망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 역사 속 귀국선 중에는 잊으면 안 될 비극도 있었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이 그것이다. 1945년 8월 24일, 패망한 일본은 해군함 우키시마호에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태운 뒤 부산항을 향해 출항시킨다. 그러나 이 배는 현해탄을 건너다가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한다. 일본 정부는 폭발 원인을 미군의 기뢰로 지목하고 한국인 524명이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79년간의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다.
이 배에 탔다 숨진 한국인의 대부분은 홋카이도·아오모리현 등 일본 도호쿠 지방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으로 노예처럼 살았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다.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즐거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의 추도가 이어졌다. 1994년에 '우키시마호 사건'의 추도회가 도쿄에 있는 사찰 유텐사(祐天寺)에서 열렸다. 이 추도회에서는 2차대전 후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B·C급 전범으로 구속되었던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동진회' 회원들도 참석해 일본의 전후 보상 문제를 추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5년 8월에 일본에서 ‘아시안 블루-우키시마호 사건’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잔학상의 한 단면을 고발하였다. 북한에서도 2000년 우키시마호 폭발사건을 실화로 한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이 제작됐고, 이 영화는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됐다.
2001년 8월에는 교토 지방법원이 이 사건과 관련된 한국인 생존자 15명에게 일본 정부가 300만 엔씩 총 4500만 엔을 배상하라는 국가배상명령 판결을 내림으로써 처음으로 원고 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소송에서 “당시 국가가 징용자에 대한 수송 책임이 없었으며, 폭침은 미국이 부설한 기뢰로 인한 것으로 불가항력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는 얼마 전 후생노동성에서 보관 중인 우키시마호 사건 관련 명부 75부의 목록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등 일부 자료공개에 나섰지만 아직까지도 전면적인 진상 조사나 공식 사과는 계속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일본·중국·동남아 등지에서의 동포 귀환은 계속됐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조국이 해방 됐지만 많은 사람들이 귀국하지 못한 채 낯선 땅에 남거나 죽었다. 혹은 우키시마호 사건처럼 돌아오는 도중에 죽기도 했다.
우리 대중가요는 해방 후 현인의 ‘고향만리’처럼 징병이나 징용 나갔다 돌아오는 ‘남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지만, 만신창이의 몸으로 돌아왔거나 혹은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노래하지 않았다. 성노예나 다름없었던 이른바 ‘위안부’에 대한 노래가 처음 나온 것이 바로 민병일의 시에 가수 이지상이 곡을 붙여 1998년에 발표한 ‘사이판에 가면’이다.
수평선 해거름 지는 사이판에 가면
자살절벽 있다지 봉숭아 물든 조선처녀들
꽃잎처럼 몸 던진 자살절벽 있다지
눈부신 햇살 번지는 사이판에 가면
신혼부부 있다지 밀월여행을 즐기는 아담과 이브
밤이 오면 무르익는 사랑노래 있다지
잡초 크게 웃자란 절벽에선 지금도
처녀들 신음소리 바람에 실려 오고
한국인 위령탑엔 갈 곳 없는 고혼들
떠돌고 있다지 맴돌고 있다지
낭만의 섬 낙원의 섬 사이판에 가면
전설 같은 정신대 조선처녀들 남긴 아리랑
아라리오 부르는 원주민들 있다지
아라리오 기억하는 원주민들 있다지
노래 '사이판에 가면'
신혼여행지와 자살 절벽, 신혼부부와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 처녀들을 대비시킨 이 노래는 아주 차분하고 잔잔한 톤으로 우리의 무관심을 죽비처럼 내리친다.
1992년에 시작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비가오나 눈이오나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