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K-팹리스의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세미파이브가 삼성전자 디자인솔루션파트너(DSP)를 넘어 고객 맞춤형 반도체 설계와 양산을 일괄 수행하는 턴키 사업으로 외형 확대에 나서고 있다. 리스크파이브(RISC-V) 기반 설계와 자회사 아날로그비츠의 IP를 활용한 라이선스 사업도 병행하며 플랫폼 기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세미파이브의 현재 사업 구조는 여전히 공정 최적화 중심의 디자인하우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형 빅테크 기업이 파운드리와 직접 협업하는 구조상 DSP가 대형 고객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고, 맞춤형(커스터마이즈드) 팹리스로 전환하기에는 인력 구조와 생태계 여건이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다.
삼성 파트너사·턴키 수주·설계 IP 강점

4일 업계에 따르면 세미파이브는 지난해 말 추진한 기업공개(IPO) 일반 청약 과정에서 15조원 이상의 증거금을 끌어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지난해 코스닥 상장 기업 중 최대 규모다. 최종 공모가는 희망밴드 상단인 2만4000원으로 확정됐다. 수년간 적자가 지속됐음에도 인공지능(AI) 맞춤형 반도체(ASIC) 수요 확대 기대와 플랫폼 기반 설계 전략이 투자 심리에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세미파이브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DSP로 2~14nm 공정 설계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리벨리온, 퓨리오사 등 AI 반도체를 설계하는 국내 스타트업의 칩 양산을 지원해 왔다. 최근에는 사피엔반도체와 마이크로발광다이오드(LED)용 CMOS 백플레인 기술 개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는 등 응용처 확대도 모색하고 있다.
턴키 기반 서비스 확대도 핵심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고객 요구에 맞춘 ASIC을 설계해 공급하는 미국 브로드컴·마벨 사례처럼, 단순 공정 최적화를 넘어 설계 전반을 수행하는 구조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세미파이브 관계자는 "턴키 수주가 늘면 개발 매출이 확대되고, 기존 양산 매출에 자회사 아날로그비츠 IP 매출도 더해져 수익 구조가 다변화된다"고 설명했다.
IP 사업 확장도 추진 중이다. ARM이 CPU 설계 IP를 라이선스하고 로열티를 받는 구조를 구축한 것과 달리, 세미파이브는 오픈소스 아키텍처인 RISC-V 기반 설계를 활용해 고객 맞춤형 칩을 지원하고 있다. 모회사인 미국 사이파이브는 ARM 중심 생태계에 대응하기 위해 RISC-V 확산을 주도해왔다. 아날로그비츠 또한 저전력 혼합신호 IP 분야 글로벌 리더로 TSMC, 삼성파운드리, 인텔 등 주요 글로벌 파운드리에 핵심 IP를 공급하고 있다.
파운드리 대행 한계·팹리스 미성숙·인력 확보 과제

업계에서는 사업 구조상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여전하다. 디자인하우스는 파운드리 출신 인력 중심의 공정 최적화 대행사에 가깝다. 칩 아키텍처를 주도적으로 설계하기보다는 고객의 파운드리 공정에 맞게 설계를 조정하는 역할에 가깝다. 특히 애플·구글·테슬라 등 대형 빅테크 기업은 파운드리와 직접 협업하는 만큼, DSP가 참여할 여지가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결국 물량이 상대적으로 작은 중소형 팹리스가 주요 고객이 되는데 국내 AI 팹리스 생태계는 미국·중국·대만과 비교해 아직 규모와 성숙도 면에서 격차가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 파운드리 가동률과 수주 상황에 따라 일감이 좌우되는 점도 변수다.
미국에서는 브로드컴·마벨이 고객 맞춤형 ASIC 설계를 통해 고성능 칩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대하고 있다. 세미파이브 역시 유사한 모델을 지향하지만, 아직 커스터마이즈드 팹리스로 보기에는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국내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종합반도체기업(IDM) 중심 산업 구조가 강해 고급 설계 인력 확보가 쉽지 않다는 점도 한계로 거론된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세미파이브가 프론트엔드까지 설계를 확대하며 커스터마이즈드 팹리스로 거듭난다는 전략이지만 인력구조상 그 수준까지 가기엔 한계가 있다"며 "브로드컴과 같은 기업으로 평가받으려면 ASIC 중심의 수익 구조 변화가 나타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RISC-V 기반 전략 역시 단기간 내 ARM 중심 생태계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는 의견이 나온다. 디자인하우스 업계 관계자는 "ARM 생태계가 워낙 공고해 기존 고객이 쉽게 전환하기 어렵고, 비용 절감을 위해 새로운 아키텍처를 채택하더라도 최적화 부담과 리스크가 따른다"고 설명했다.
세미파이브 관계자는 "미국·일본 등 해외 수주가 확대되고 있으며 지난해 3분기 기준 매출의 60%가 해외에서 발생했다"며 "삼성 파운드리 가동률이 개선되고 수주가 늘어나면 파운드리 자체 캐파(생산능력)를 늘릴 수 있고 같은 생태계에 있는 디자인하우스 업황도 개선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그간 국내 팹리스와 쌓아온 업력이 있고 국내 디자인하우스와 협력해 경쟁력을 키워 시장 지배력을 높여야 하는 측면도 있다"며 "RISC-V는 ARM과 단순 비교하기보다 고객 요구에 맞는 성능을 구현하는 하나의 선택지로 경쟁력을 확보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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