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 영화평론가]
경쟁자로 만난 두 소녀, 서로의 세계를 넓히다: 만화를 그리던 후지노와 그림에 몰두하던 쿄모토는 서로 다른 재능으로 하나의 창작 세계를 만들어가며 함께 성장한다.
되돌릴 수 없는 이별, 상상으로 다시 쓰는 과거: 뜻하지 않은 쿄모토의 비극 앞에서 후지노는 자신이 그녀를 바깥세상으로 이끌었던 선택을 되돌아보며, 만화 같은 상상으로 둘의 과거를 다시 그린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만화 속에서 이어지는 우정: 과거를 바꿀 수는 없어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후지노는 다시 만화를 그리며 쿄모토와의 추억을 품고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룩 백>
일본의 거장 영화감독으로 꾸준하게 영화를 만들어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신작을 발표했다. 한국에 팬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신작 발표 때마다 관심을 끈다.
고레에다 감독 하면 가족영화 장르가 먼저 떠오르는데, 한때 자신은 "이제 가족영화는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언까지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가족이나 가족과 유사한 관계에 관심을 보인다.

'룩백'을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신작인 <룩백(Look Back)>역시 고레에다 감독이 본래 천착했던 주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가족영화는 마냥 훈훈하지는 않다. 고레에다 감독 영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단순한 가족애로 훈훈하게 마무리 짓는 대신 가족영화 장르에 사회적인 이슈를 담아 관람 후에도 오랫동안 가슴에 가시가 꽂힌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고요한 흐름 속에는 가시처럼 시니컬한 요소가 들어 있다. <룩백>의 원작인 단행본 만화책을 본 순간 고레에다 감독은 꼭 영화로 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어떤 점이 고레에다 감독에게 그렇게 강한 동기를 심어줬을지 궁금해졌다.
<룩백>은 초등학교 선후배인 후지노(데구치 나쓰키 분)와 쿄모토(마키타 아쥬 분)의 관계를 영상 언어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사보다 더 많은 느낌을 전달하게 만드는 고레에다 감독의 연출기법이 돋보인다. 친구지만 거의 자매처럼 한 집에서 지내온 두 사람의 성장영화이면서 후지노와 쿄모토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상징성이 담겨 있다.
원작 만화(후지모토 다쓰키 작가)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 서사가 노출됐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실사 영화가 전달할 수 있는 다른 느낌을 찾는다.

최근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룩백' 포스터.
초등학교 신문 '네 컷 만화'의 어린 두 작가
후지노는 초등학교 신문에 '네 컷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데, 자신의 만화를 보고 재미있어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행복하고 자신이 자랑스러워진다. 그러나 대적할 자가 없는 일인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후지노 앞에 강적이 나타난다.
쿄모토는 사람과 만나기를 두려워해 등교를 거부하지만 만화는 그리고 싶어 해서 둘이 함께 네 컷 만화를 연재하기로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후지노의 코믹한 캐릭터 묘사와 서사에 익숙해 있던 친구들은 쿄모토의 그림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느낀다. 게다가 쿄모토의 그림은 후지노에 비해 훨씬 세밀하다. 후지노도 충격을 받았지만 "같이 놓고 보니까 후지노 그림은 평범하잖아"라는 학우의 말에 자존심이 크게 상한다.
그림 실력을 더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그림 그리기에 관한 서적을 모두 구입하고 기초부터 다지기 시작한다. 후지노의 책장에 그림 그리는 법에 대한 책이 하나씩 늘어나는 모습은 나중에 후지노가 출판한 연재 만화책이 하나씩 쌓이는 장면과 똑같이 연출된다.
쌓인다는 의미, 그리고 반대로 되돌린다는 의미가 영화에서는 대비를 이룬다. '룩백'이라는 제목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관계를 되돌리고 싶은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후지노가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유가 후반부에 나온다.
교지에 나란히 실린 후지노와 쿄모토의 네 컷 만화는 두 사람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후지노의 만화는 재미있는 캐릭터와 대사가 중심이지만, 쿄모토의 만화에는 대사가 없다. '방과 후'라는 제목으로 올린 쿄모토의 첫 만화에는 학생들이 모두 떠난 교실의 분위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켜줬던 친구
<룩백>에서 대조되는 두 가지 요소는 멈춰 있는 배경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 두 요소는 후지노와 쿄모토의 성향, 나아가서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연결된다. 후지노는 서사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고,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이다. "만화 그리는 건 지겨워, 만화는 그냥 보기만 해야 해"라는 후지노의 말에 쿄모토가 "그러면 선배는 왜 만화를 그리세요?"라고 묻자, 대답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 전에 아이디어가 먼저 떠올랐을 이야기꾼이 후지노다. 그래서 캐릭터와 서사는 후지노가 담당하고, 그림 실력이 좋고 세밀한 묘사에 끌리는 쿄모토가 배경을 담당한다.
타인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쿄모토와 사교성이 좋은 후지노의 성격도 서로 보완적이라서 궁합이 잘 맞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끝까지 가지 못한다. '후지노 쿄'라는 둘의 이름을 합친 필명으로 유명 만화작가가 되었지만 쿄모토는 이 길은 후지노의 길이지, 자신의 길은 다른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쿄모토는 이야기보다는 그림 자체에 더 관심이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이제는 혼자 힘으로 바깥 세상과 맞설 용기가 생길 만큼 성장했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독립 선언에 분노했지만 그녀 역시 쿄모토 없이도 작업을 할 만큼 여건이 좋아진 상태다. 어시스턴트도 몇 명씩 둘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기술의 발전으로 만화의 배경 수정과 채색 작업도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후지노는 어느 순간 성공으로 채워지는 만큼 비워지는 구석을 느끼게 된다. 빈 곳을 채워줘야 할 쿄모토는 이제 옆에 없다. 관계의 중요함은 영화의 후반부에 과거로 되돌아가 둘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장면에서 강조된다.
고레에다는 영화를 통해 인간에게 '관계란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감독이다. <룩백>에서 후반부에 바뀐 과거를 상상하는 시퀀스는 후지노에게 성공보다 쿄모토의 관계가 얼마나 더 소중했는지 보여준다.
'묻지마'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쿄모토를 상상하며
함께 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공간에서 소중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위안이 될 수 있다. 쿄모토가 다니던 미대에서 발생한 '묻지 마' 사건으로 희생됐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후지노에게 다가온 자책감은 그녀의 의식을 과거로 돌려보낸다.
방안에서 그림만 그리던 쿄모토를 바깥 세상으로 이끌어준 사람이 후지노였기 때문이다. 쿄모토를 그 때 밖으로 끌어낸 일이 과연 잘 한 일이었을까 되돌아보며, 후지노는 만화 같은 상상으로 과거를 바꾼다. 둘만이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는 애도의 방식이다. 애도를 끝낸 후지노가 다시 돌아간 곳 역시 만화를 그리는 책상 앞이다. 그리고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뒷모습은 늘 그랬듯 변함이 없다.
<룩백>에서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는 인상적인 장면들과 연출 기법이 있다. 가장 먼저 초등학생인 후지노가 처음으로 쿄모토를 만난 후 집으로 돌아올 때의 표정과 몸동작, 그리고 배경 화면을 언급하고 싶다. 후지노가 처음으로 경쟁심을 느꼈던 사람은 쿄모토였다. 그러나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깎듯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극찬하자, 몇 년간 쌓여왔던 열등감과 압박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해방감과 희열이 후지노를 휩싼다.
혼자 사는 세상과 함께 하는 세상
카메라는 후지노가 행복에 젖어 비를 맞으며 춤추듯 뛰어가는 모습을 슬로 모션으로 몇 분간 잡는다. 이 장면은 후지노의 삶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자신을 믿어주는 쿄모토는 그 때부터 그녀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후지노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뛰어가던 길은 나중에 쿄모토와 함께 흰 눈밭을 걸어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화면 전체를 채운 흰 눈을 배경으로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쌓인 눈밭을 걷는 모습과 둘이 남긴 발자욱은 둘만의 창작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후지노의 쿄모토의 관계를 보여준다.
<룩백>에서 카메라의 초점은 순전히 두 아이들에게 향하고 있으며 둘의 세계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어른들은 보조 역할만 할 뿐 이들의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 영화는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려는 듯, 책상 앞에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후지노의 뒷모습을 여러 컷으로 보여준다.
그림에만 몰두해 방문을 걸어 잠가도 후지노의 부모는 한 마디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중학교에 가서도 그림만 그리다가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도 교사는 후지노를 깨우지 않는다. 자는 동안에도 후지노는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다. 혼자 있어도 후지노는 꿈 속에서 쿄모토와 만화를 위해 서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은 혼자 있는 장면과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을 비교하듯 배치해 혼자 사는 세상과 둘이 함께 하는 세상을 번갈아 보여주며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상상 속에서 늘 함께 하는 친구를 위해
후지노가 집에 가다가 화면 정중앙에 자리 잡은 한 마리의 백로를 쳐다보는 장면, 나중에는 쿄모토가 후지노와 똑같은 자세로 백로를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움직임과 정지, 그리고 혼자인 두 존재의 마주 봄이 <룩백>에서 연출하고자 하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곳곳에서 그런 상징성이 있는 장면들을 발견하는 것 또한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중의 하나다. 이 영화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힐링 영화'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이유는 둘은 앞으로도 상상 속에서 늘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고 그런 둘의 관계가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연재를 중단했다가 만화 그리기를 다시 시작하는 후지노의 등을 보여주는 엔딩 장면도 삶의 모든 희노애락을 포용하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어쨌거나 삶은 계속되고 후지노의 만화도 계속되며 그의 만화 속에서 쿄모토는 영원히 살아 있을 터이다.
#고레에다_히로카즈 #더칼럼니스트
※ 이화정 영화평론가는 700여편의 영화를 번역하고 영화이론과 통합예술치료를 공부했다. SBS 스브스프리미엄 등 여러 매체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칼럼을 썼고 현재 국제영화비평가연맹(피프레시) 한국본부 국제이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