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감세 승부수에 "최악 정책" 일색..한국도 남 일 아니다
공급 확대, 부자 감세 논란 등 한국과 똑같아
‘악수(나쁜 수), 자충수(자신에게 불리한 행동), 사상누각(모래 위에 지은 집)…’
영국 정부의 대규모 감세정책 발표 직후, 한국 증권사들이 쏟아낸 분석보고서의 제목들이다. 고물가·고금리 시기의 대대적인 감세가 영국 채권과 통화의 ‘쌍끌이 약세’를 이끌며 세계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영국의 감세정책 발표가 나온 23일 <블룸버그 텔레비전>과 인터뷰에서 “영국은 오랫동안 주요국 중 최악의 거시 경제정책을 추구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과 ‘닮은 꼴 감세’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도 정책 수정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정부가 연 450억파운드(약 69조원) 규모 감세를 추진하는 핵심 이유는 “세제 혜택과 개혁을 통해 경제의 (기업 세금 감면과 규제 완화 등을 통해)공급 측면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가 대기업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구조 개혁 등 공급 중심의 경제 기조를 밀어붙이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감세를 통한 공급 확대 효과가 통상 장기적으로 나타나거나 불투명한 반면, 부작용은 작지 않다는 점이다. <파이낸셜타임즈>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최근 칼럼에서 “공급 측면의 (개혁) 약속은 환상이지만, 재정과 경제에 미칠 위험은 그렇지 않다”고 꼬집었다. 고물가 시기에 감세 정책은 거시 경제 불안정만 초래할 현실적 위험이 크다는 얘기다.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요즘 영국 채권시장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길트 탠트럼’(영국 국채 발작) 현상이다. 영국의 만기 2년짜리 국채 금리는 지난 26일 전 거래일에 견줘 0.62%포인트 오른 4.53%에 마감했다. 이는 감세를 앞세운 영국 정부가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려면 당장 대규모 국채 발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채권 공급 확대와 강달러 현상에 따른 영국 국채 투자수익률 부진 우려 등이 겹치며 시장에서 영국 국채 투매 현상이 벌어지고 국채 금리가 튀어 올랐다. 이번 감세 조처가 시장의 수요를 늘려 오히려 물가를 자극하고 정책금리 인상 및 경기 침체를 가속화하리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물가와 금리가 고공 행진하는 시기엔 이런 국채 발행의 부정적 여파가 한층 커진다. 물가 안정과 성장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고금리 여파로 정부 빚만 불어나며 국가 신용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다. 최근 영국 국채가격과 함께 파운드화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폭락한 것도 영국 정부의 경제정책을 향한 시장의 신뢰가 추락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트위터에서 “영국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에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유로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국과 한국 모두 집권 초에 정책 전환을 앞세우며 법인세·소득세·부동산세 감세 등을 추진하고, 내부적으로 ‘부자 감세’와 ‘낙수 효과’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판박이다. 영국 싱크탱크 <레졸루션파운데이션>은 최근 펴낸 보고서에서 “이번 감세 혜택의 3분의 2가 영국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상위 5분의 1 가구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재무부도 우리 기획재정부와 같이 “부자 감세가 아니다”라고 적극 해명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감세가 정책 신뢰를 낮추고 논란만 낳고 있는 모양새다.
영국과 한국의 차이점도 물론 있다.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2020년 기준 102.6%로 한국(48.9%)의 2배가 넘는다. 탄탄한 수출 제조업을 버팀목 삼아 경상수지(국가의 전체 저축-투자) 흑자를 지키는 한국과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를 겪으며 에너지 위기에 취약한 영국 사정은 다르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대외 이슈의 영향이 워낙 커지며 과거보다 개별 국가들의 정책에 시장이 민감하게 움직이는 편”이라며 “영국은 감세와 지출 확대로 엄청난 재정 적자를 내며 대규모 국채를 발행하게 됐지만, 우리는 코로나19 시기 대비 지출을 줄여 재정 수지(수입-지출)가 개선되는 만큼 기본적인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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