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껌 사건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절대로 화면에서 눈을 떼면 안돼. 캐스터는 시청자와 같은 화면을 보고 있어야해. 현장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캐스터는 끝이야.”
2004년 첫 현장 중계방송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당시 메인PD였던 L피디의 조언이었다. 사실 김이 팍 샜다.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를 좋아해서 오랜 시간 꿈꿔온 직업을 가지게 됐는데 스포츠 현장에 가서 현장을 보지 못한다니. 하지만 곧 이해를 하고 납득을 했다. 시청자가 보고 있는 화면을 말하고, 시청자가 보고 있는 화면에서 말할 꺼리를 찾아내는 것이 내 임무라는 것을 말이다.
이후 지금까지도 항상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스포츠 현장을 갔지만 두 눈으로 경기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꼭 눈으로 보고 싶은 경기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중계석의 위치가 링 사이드라 기가 막혔던 K-1 월드 그랑프리라던지. 올림픽 중계방송에서의 금메달 결정전 – 대표적으로 리우 올림픽 펜싱 에페 박상영 선수의 결승전 - 같은 경우는 정말 눈을 들어 현장에서 펼쳐지는 감동의 순간을 보고 싶었다.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 게임, 프리미어12와WBC 등등. 많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 중계방송 참여를 했지만 나는 현장에 가서도 현장을 보지 않고, 그들이 제공해주는 IS 중계 화면에 집중했다.
IS는 International Signal(국제 신호)의 약자다. 국제 스포츠 이벤트의 경우 한 화면을 놓고 여러 국가에서 중계방송을 해야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준화된 방식에 따라 중계방송을 제작하게 된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올림픽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 보시라. IS 중계방송은 규격화된 중계방송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매 경기, 경기에 돌입하기 직전까지는 똑같은 순서로 진행을 한다.
일반적으로 대기를 할 때는 경기장을 비추는 샷이 나오고, 장내 아나운서가 경기 개시를 이야기하면 대진 자막이 뜬다. 그리고 대진표가 나온다. 선수가 한 명, 한 명 씩 입장을 한다. 그 선수의 이름을 표출한다. 경기를 시작하는 위치에 도착 후, 양국의 국가가 나오는 동안 전의에 불타는 선수와 코칭스태프, 이어서 국가를 따라부르고 있는 관중들을 순서대로 찍는다. 그 때 이 선수가 어떤 대진을 통해 여기까지 올라왔는지도 함께 자막으로 표출한다. 국가 연주가 끝나고는 주심-부심-비디오 심판 순으로 심판을 소개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양쪽 선수를 한 번씩 비추고 경기 개시.
팀 스포츠와 개인 종목, 기록 종목의 차이가 조금씩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결의 형식을 이루는 중계방송에의 IS 중계방송은 위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철저하게 틀에 맞게 중계방송을 하는 이유는 위에서 이야기를 한 것처럼 이 한 화면을 놓고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방송사에서 중계방송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현장 중계방송을 할 때의 캐스터의 시각과 국제 신호 중계방송. 나는 왜 지금 이렇게 아무도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 있을까? 사실 대중에게 위 두 가지 사실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걸 안다고 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닐 거고 말이다. 어디서 이걸 아는 척하다고 해도 ‘우와! 그런 걸 어떻게 알아?’라는 시셈을 받을만한 지식도 아니다. 그냥 날마다 TV에서 나오는 중계방송은 그냥 들으면 되는 거고, 올림픽이나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IS 몰라도 지상파 방송국 3사가 최선을 다한 화면과 오디오를 보내준다. 입맛대로 골라서 보고 들으면 되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지난 주 있었던 모 해설위원의 프로야구 레전드 디스로 인해 함께 부각됐던 KT 위즈의 국가대표, ‘강백호 선수의 껌 씹는 장면 표출 사건’ – 내키지는 않지만 이하 ‘강백호 껌 사건’으로 칭하려 한다. –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건과 관련해 큰 것 한가지를 그동안 놓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만 놓고 보면 강백호는 억울했다. 왜? 이 중계방송은 국제 신호, IS 중계방송이었기 때문이다.
IS 중계방송에 대해 위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것을 보더라도 특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IS 중계방송에서는 경기를 철저하게 표준화 해서 중계방송을 제작한다. 매 경기 같은 형식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매 경기 상황에 따른 카메라 워크도 거의 유사하다. 이것을 우리는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의 ‘중계 제작의 표준화’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용적인 측면은 어떨까? 당연히 객관성을 추구한다. 국내 중계방송의 경우도 모든 스포츠 중계방송은 객관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사실 승부 결정의 순간이 되면 승자 측으로 살짝 기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국제 신호는 그래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올림픽은 참가에 의의를 둔 대회이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더라도 둘을 매우 동등한 입장에서 다루게 된다. 그리고 출전 선수들의 승리와 패배는 각 개인의 성취나 실패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이를 시청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곧 국가의 승리와 패배로 인식되기 십상이라 패배의 아쉬움과 최선을 다한 패자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낼 수 있는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경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이를 ‘중계 내용의 객관성’이라고 이름 붙이도록 하자.
자, 그럼 2021년 도쿄에서 벌어진 2020 도쿄올림픽 야구 동메달 결정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강백호가 껌을 씹는 모습의 화면은 ‘중계 내용의 객관성’에 어울리는가?
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부터 올림픽 중계방송을 해왔다. 열심히 시청했던 첫번째 기억 속의 올림픽은 1984 LA 올림픽이었다. 그 때 레슬링에서 첫 금메달을 따냈던 고 김원기 선수의 이름을 당시 장내 아나운서가 김’용’기라고 발음을 했는데 정우영 어린이는 이게 그렇게 서러웠었다. 우리가 약소국이라서 미국 아나운서가 저러는 거냐고 어머니에게 물을 정도로. 그렇게 올림픽은 모두에게 특별한 대회이고 수많은 주옥 같은 순간들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그 많은 장면들 속에서도 나는 올림픽에서 저런 난폭한 화면은 본 적이 없다. 강백호는 그 경기에서 폭행을 당한 거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중계방송이 현장에서 제작되고 시청자들에게 전달이 되는지를 알아보자. 쉽고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경기장 -> 중계차 > 방송사 (부조정실 -> 주조정실) -> 시청자
1. 중계차에서 그림을 만든다. 이걸 클린 피드라고 한다.
2. 그 그림이 방송사의 부조정실로 가서 자막이 입혀진다. 이게 더티 피드다.
3. 주조정실을 통해 시청자에게 송출이 된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음성이 입혀지는 타이밍은 1이 될 때가 있고, 2가 될 때도 있다. 1은 현장중계를 할 때고, 2는 스튜디오에서 오프-튜브 중계방송을 할 때다.
현장의 중계차에는 - SBS스포츠 중계차 기준 – 한 대에 최소 8대에서 최대 14대의 카메라를 연결할 수 있다. 중요한 경기나 중계차가 커버를 해야할 범위가 넓은 규모의 중계방송, 예를 들면 마라톤이나 골프 중계일 경우 중계차를 연결한다. 즉, n대의 중계차가 투입되면 최대 14 X n 대의 카메라를 중계방송에서 활용할 수 있다. 중계차 두 대를 연결하면 28대의 카메라를, 세 대를 연결하면 최대 42대의 카메라를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계방송에서 메인PD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메인PD는 각각의 카메라에 어떤 포지션에서 어떤 카메라 워킹을 해줄 것인지를 카메라감독들에게 요청을 하고, 경기에 돌입한 후 n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잡아주는 화면에서 딱 하나를 골라내야 한다. 이 과정을 커팅(cutting)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그 순간 그 장면을 잘라낸다는 의미다. 이 커팅은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작업이나 가장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중계방송에는 메인PD의 중계 철학이 담긴다. 역동성을 강조하는 PD는 같은 인플레이 상황도 잘게 쪼개서 커팅을 하고, 또 슬로우모션과 리플레이도 자주 끼워 넣는다. 반면에 경기 자체에 집중하는 유형은 롱-테이크로 선수들을 따라가고 우리가 익숙한 메인 카메라 샷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국내 중계방송의 경우, 메인PD가 직접 구상을 하고, 라이브 상황에서 직접 커팅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 중계의 경우는 메인PD는 지시만 하고, 커팅 작업은 커팅을 담당하는 디렉터를 따로 두는 경우도 있다. 미국이 후자의 방식을 선호하고 많은 빅이벤트에서 이런 방식으로 중계를 하고 있다. 어쨌든 직접 버튼을 누르건 안 누르건 메인PD의 철학이 화면에 드러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 여러분은 강백호 껌 사건에서 당시 중계방송 메인PD의 어떤 철학을 느꼈나?
중계에서 메인PD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IS 중계는 ‘형식의 표준화’와 ‘내용의 객관화’가 가장 기본인 중계방송이라는 언급을 위에서 한 바 있다. 따라서 IS 중계방송에는 메인PD의 중계 철학은 객관성이 되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서 주최사에서 요구하는 형식의 그림을 제대로 ‘잘’ 만들어주면 그보다 더 완벽한 IS 중계 화면은 없다.
나는 도쿄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 당시 목동 SBS방송센터의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생중계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강백호의 그 장면이 화면에 뜨자마자 두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큰일났다.’
‘욕먹겠다.’
그래서 언급을 자제하면서 지나갔다. 그러나 이 경기는 지상파 3사가 동시 중계를 하고 있었고, 우리 야구 최고의 레전드 중 하나는 강백호 선수에게 ‘이러지 말고 미친듯이 응원해달라.’고 당부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고 생각하고 이게 비난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후 이어진 강백호를 향한 대중의 비난도 그 레전드의 한 마디에서 비롯됐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경기는 지상파 3사의 동시중계였고, 시청률도 3사가 비슷하게 나눠 가졌기 때문에 그 레전드의 중계 멘트를 절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듣고, 그에 따라 강백호를 비난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냥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지고 있는 그 상황에서 화면 속의 껌을 씹는 강백호의 모습이 싫었던 거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다.
대체 그 메인PD는 올림픽이라는 중계방송에서 그런 화면을 왜 커팅했을까? 올림픽 야구 동메달 결정전은 최소 두 대에서 세 대의 중계차가 붙어있었을 것이다. 못 돼도 30대 안팎의 카메라가 동시에 야구장의 곳곳을 훑고 있었을 텐데, 하필 그 순간 메인PD가 최고의 화면으로 판단한 장면이 남의 나라 대표팀 중심 타자가 껌을 씹고 있는 장면이라는 말인가?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말이다.
나는 앞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계방송의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올림픽이라는 무대에서 이렇게 한 선수에게 폭력적인 화면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당시 경기의 메인PD의 마음이 돼서 그 장면을 넘긴다는 상상을 몇 번이고 해봤다. ‘과연 어떤 마음이면 그 장면을 보면서 커팅 버튼을 누르게 될까?’하는 상상 말이다.
가장 먼저 생각이 드는 것은 ‘얘 봐라. 진짜 웃기다.’다. 메인PD가 정말 그 장면이 웃겨서 커팅 버튼을 눌렀다는 가정이다.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다른 경우 보다는 순수하다.
다음은 ‘이것 봐! 너네 중심 타자가 지금 껌 씹고 있어!’라 우리나라 팬들에게 화면을 통해 일러바치는 경우다. 이럴 경우 메인PD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게 알고 있다. 그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야구PD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야구팬들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주 극단적인 생각일 수 있는데 ‘이래서 너희는 진 거야.’라고 우리를 조롱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외에는 잘못 누른 경우도 있겠으나 두 번이나 길게 화면에 나갔기 때문에 그것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당시 메인PD의 생각은 위 세가지 중 어디에 해당할까? 어디에 해당하든 이 당시 강백호는 폭력에 가까운 메인PD의 화면 구성에 일방적인 구타를 당했다고 봐도 된다. 시즌 야구 중계방송에도 잘 나오지 않을 법한 화면이 국가간 경기에 나오면서 그 비난은 더더욱 커졌다. 메인PD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면 그 의도는 정확히 적중했던 거다.
당시 우리는 이런 측면으로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OBS(Olympic Broadcasting System)측으로 공식적인 항의를 해도 무방 했을 장면은 결국 선수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고 말았다.
2년이 지났다. OBS의 각 경기장 방송 팀은 프로젝트 팀의 성격을 띈다. 우리 SBS스포츠도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하계와 동계에 각각 종목을 맡고 있다. 당시 도쿄 올림픽에서 야구를 담당하고 제작했던 방송사와 당시의 메인PD도 지금 일본의 어딘가에서 현업으로 뛰고 있을 것이다. 가끔 강백호 선수의 성적을 들추고 또 어제 같은 이슈가 터지면 그 사람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백호 선수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던 도쿄올림픽 야구 중계방송의 메인PD에게 설욕하기 위해서라도 강백호 선수가 더 큰 선수가 돼 줬으면 한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