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역사를 빛낸 주인공을 찾아서…11

BRILLIANT LEGACY

V12 엔진을 보닛 속에 품고 뒷바퀴를 굴리는 2시트 페라리는 곧 정통성을 의미한다. 12칠린드리는 유구한 역사를 잇는 위대한 유산이다. 하지만 그 계보가 끊긴 때가 있었다. 페라리는 1968년 출시한 365 GTB4를 끝으로 최상위 포식자의 모습을 미드십으로 그렸다. 당시 프런트 엔진, 뒷바퀴굴림 구성은 운동 성능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무게 중심이 월등히 좋은 미드십을 쉽게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정통성을 되찾을 기회가 찾아왔다. 페라리는 첨단 장비의 도움을 받아 FR 구조의 한계를 극복했다. 주인공은 바로 1996년 등장한 550 마라넬로다. 페라리가 간절히 바라던 정통성을 되찾는 데 20년이 넘는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름 뒤에 마라넬로를 붙였을지도 모른다. 마라넬로는 페라리가 처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그들은 정통성의 회복을 기리기 위한 방법을 페라리의 뿌리에서 찾았다.

디자인은 피닌파리나의 작품이다. 2+2시트 구성의 456 GT의 디자인 언어를 이어받되 보다 날렵한 선으로 공격성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페라리의 정통 V12 모델에서 영감받은 디자인 요소도 듬뿍 담았다. 보닛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공기 흡입구는 1960년대를 주름 잡은 250 GTO에서 가져왔고, 앞 펜더에 파 넣은 상어 지느러미는 275 GTB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동그란 원 2개를 나란히 줄 세운 테일램프는 365 GTB/4의 헤리티지를 잇는다.

엔진은 역대 최강 V12를 지향했다. 550 마라넬로는 F512 M의 후속 모델로 볼 수 있다. F512 M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배기량 5.0L의 12기통 심장을 차체 중앙에 품고 최고출력 440마력을 뿜었다. V12는 아니었다. 서로 마주한 실린더가 180도로 누워있는 플랫 12 구조였다. 보통 플랫 구조 엔진은 실린더 한 쌍이 붙었다 떨어지며 폭발한다. 주먹 2개가 서로 맞부딪치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박서 엔진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페라리의 플랫 12 엔진은 실린더 한 쌍이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노래 ‘흥부가 기가막혀’ 율동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550 마라넬로는 다시 V12로 돌아왔다. 배기량은 5.5L로 늘었다. 최고출력은 485마력이다. 엔진 블록과 실린더 헤드, 오일팬 등 부피가 큰 부품은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들어 무게를 줄였다. 커넥팅 로드는 무려 티타늄 합금이다. 변속기는 6단 수동변속기를 짝지었다. 참고로 페라리가 양산차 최초로 1997년 F355에서 선보인 F1 자동변속기는 2002년 등장한 575M 마라넬로부터 선택 가능했다.

보다 강력한 심장은 페라리의 정통성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550 마라넬로의 숨은 조력자는 따로 있다. 차체 자세 제어 장치를 비롯한 첨단 전자 장비다. 페라리는 전자 두뇌를 이용해 ASR(Anti Slip Requlation) 시스템을 실현했다. 주행 상황을 스스로 파악해 최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가령 주행 속도와 스티어링 각도, 스로틀 개방량을 감지해 현재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 주행 모드에 따라 출력을 제한하고, ABS 개입량과 서스펜션 댐퍼압을 조절하는 등의 기능도 누릴 수 있었다. 노멀 모드에서는 전자 장비 개입을 늘려 안정성을 높이고, 스포츠에서는 운전자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영국의 자동차 전문지 <오토카>는 1996년 11월호에서 550 마라넬로의 가속 성능을 공개한 바 있다. 자체 실험 결과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 시간은 4.6초, 시속 161km까진 10.1초가 걸렸다. 최고시속은 320km였다. 페라리는 550 마라넬로의 성능을 전 세계에 뽐내고자 1998년 ‘월드 스피드 레코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12km 길이의 오벌 트랙을 따라 100마일(161km)을 얼마나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 겨뤘는데, 550 마라넬로는 평균 시속 306km로 세계 기록을 갈아치웠다. 페라리는 33대의 한정판 550 마라넬로를 만들어 이를 기념했다.

550 마라넬로는 우리가 지금까지 프런트 엔진 V12 페라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탑기어>는 곧 12칠린드리를 만나기 위해 룩셈부르크로 떠날 예정이다. 12칠린드리를 통해 550 마라넬로와 그 뒤를 이어 나온 575M, 599 GTB, F12 베를리네타, 812 슈퍼패스트의 숨결을 깊이 들여 마시고 돌아올 계획이다. <탑기어> 11월호에서 12칠린드리와 V12 페라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나보기 바란다.

글 이현성 사진 페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