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모 쓴 ‘칠곡할매’들…“이름 쓸 줄도 몰랐는데, 고맙지예”

김현수 기자 2023. 1. 2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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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청서 명예졸업장
난생 첫 교복에 ‘덩실덩실’
경북 안동 풍천면 경북도청 1층 미래창고에서 25일 ‘칠곡할매글꼴’ 주인공인 할머니들이 이철우 경북도지사(오른쪽)에게 수업을 받고 있다. 김현수 기자

“차렷! 선생님께 경례!”

25일 오전 경북 안동 풍천면 경북도청 1층 미래창고. 평소 직원들이 책을 읽는 이곳에 1970년대 복고풍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칠곡할매글꼴의 원작자 중 한 사람인 김영분 할머니(77). 할머니는 이날 경북도가 준비한 한글수업교실에서 반장을 맡았다.

이 반 학생들은 칠곡할매글꼴을 만든 추유을(89)·이원순(86)·권안자(79) 할머니다. 최고령인 이종희 할머니(91)는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교실에는 칠판과 옛날 모습을 간직한 책걸상이 놓이고 태극기까지 내걸려 1970년대 학교를 떠올리게 했다. 교단에 선 선생님은 교사 출신인 이철우 경북도지사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할머니들이 씩씩하게 인사하자 반장 역할을 마친 김 할머니가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해 교실 안 모든 상황이 생소해서다. 김 할머니는 “갑자기 내(나)보고 반장 하라캐서(하라고 해서) 을매나(얼마나) 놀랐는지. 몇 번이나 연습했는지 몰라”라며 곱게 차려입은 교복을 정성스레 어루만졌다.

할머니들은 이날 교복을 처음 입어봤다. 출생연도는 모두 다르지만 어려웠던 집안 사정은 같았다. 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를 잃은 권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남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식모살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온 탓에 공부는커녕 이름 세 글자도 쓸 줄 몰랐다. 관공서에서 갑작스레 내민 서류에 이름을 적어야 할 때마다 부끄럽고 속상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원순 할머니는 받아쓰기 시험을 대비해 손바닥에 답안을 적어둬 주변의 웃음을 자아냈다. 수업 시작 전 이 지사의 출석 호명에 가장 큰 소리로 대답하는 등 열의를 보였던 이 할머니는 경북도가 준비한 상장을 받자 “이런 날이 어딨노”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각각의 사연을 가진 할머니들은 2017년 칠곡군 성인문해교실에서 배움의 한을 풀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글을 배웠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도 빠트린 적이 없다고 한다.

할머니들의 글씨는 세월이 흘러 각자의 개성을 담은 글씨체가 됐다. 칠곡군은 할머니들의 글씨체를 활용해 2020년 12월 칠곡할매글꼴을 만들었다. 이 글꼴은 지난해 한컴오피스와 MS오피스 프로그램에 정식 탑재됐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칠곡할매글꼴을 휴대용 저장장치(USB)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 글씨체로 올해 각계 원로와 주요 인사 등에게 연하장을 썼다.

이날 수업에 참석한 할머니들은 경북도민행복대학 이름으로 명예졸업장을 받고 학사모를 썼다. ‘위 학생은 행복대학 수업에서 위와 같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라고 적힌 상장도 받았다. 할머니들은 학사복을 입은 채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이 할머니는 “이름 쓸 줄도 몰랐는데 한글을 배우게 해줘서 참말로(정말로) 고맙다. 졸업장도 받고 상장도 받아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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