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모 쓴 ‘칠곡할매’들…“이름 쓸 줄도 몰랐는데, 고맙지예”
난생 첫 교복에 ‘덩실덩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25일 오전 경북 안동 풍천면 경북도청 1층 미래창고. 평소 직원들이 책을 읽는 이곳에 1970년대 복고풍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칠곡할매글꼴의 원작자 중 한 사람인 김영분 할머니(77). 할머니는 이날 경북도가 준비한 한글수업교실에서 반장을 맡았다.
이 반 학생들은 칠곡할매글꼴을 만든 추유을(89)·이원순(86)·권안자(79) 할머니다. 최고령인 이종희 할머니(91)는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교실에는 칠판과 옛날 모습을 간직한 책걸상이 놓이고 태극기까지 내걸려 1970년대 학교를 떠올리게 했다. 교단에 선 선생님은 교사 출신인 이철우 경북도지사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할머니들이 씩씩하게 인사하자 반장 역할을 마친 김 할머니가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해 교실 안 모든 상황이 생소해서다. 김 할머니는 “갑자기 내(나)보고 반장 하라캐서(하라고 해서) 을매나(얼마나) 놀랐는지. 몇 번이나 연습했는지 몰라”라며 곱게 차려입은 교복을 정성스레 어루만졌다.
할머니들은 이날 교복을 처음 입어봤다. 출생연도는 모두 다르지만 어려웠던 집안 사정은 같았다. 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를 잃은 권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남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식모살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온 탓에 공부는커녕 이름 세 글자도 쓸 줄 몰랐다. 관공서에서 갑작스레 내민 서류에 이름을 적어야 할 때마다 부끄럽고 속상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원순 할머니는 받아쓰기 시험을 대비해 손바닥에 답안을 적어둬 주변의 웃음을 자아냈다. 수업 시작 전 이 지사의 출석 호명에 가장 큰 소리로 대답하는 등 열의를 보였던 이 할머니는 경북도가 준비한 상장을 받자 “이런 날이 어딨노”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각각의 사연을 가진 할머니들은 2017년 칠곡군 성인문해교실에서 배움의 한을 풀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글을 배웠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도 빠트린 적이 없다고 한다.
할머니들의 글씨는 세월이 흘러 각자의 개성을 담은 글씨체가 됐다. 칠곡군은 할머니들의 글씨체를 활용해 2020년 12월 칠곡할매글꼴을 만들었다. 이 글꼴은 지난해 한컴오피스와 MS오피스 프로그램에 정식 탑재됐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칠곡할매글꼴을 휴대용 저장장치(USB)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 글씨체로 올해 각계 원로와 주요 인사 등에게 연하장을 썼다.
이날 수업에 참석한 할머니들은 경북도민행복대학 이름으로 명예졸업장을 받고 학사모를 썼다. ‘위 학생은 행복대학 수업에서 위와 같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라고 적힌 상장도 받았다. 할머니들은 학사복을 입은 채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이 할머니는 “이름 쓸 줄도 몰랐는데 한글을 배우게 해줘서 참말로(정말로) 고맙다. 졸업장도 받고 상장도 받아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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