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 제한 특별법도 결국 거부한다…‘윤석열식 거부권’의 탄생

김남일 기자 2024. 9. 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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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헌의회에서 예고됐던 ‘윤석열식 거부권’의 탄생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위원회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의장에게 잠깐 언권 주시겠어요? 어느 정부에서든지 행정부 수반되는 이에게 국회를 통과한 국회법안을 부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아마 공산정부에서는 모르겠으나 아마 다른 데에는 없을 것입니다.”

1948년 7월5일 제헌국회 의사당인 서울 종로 중앙청에서 열린 국회 본회의. 헌법 제정을 위한 헌법안 제2독회가 진행 중이었다.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 조항을 두고 의원들 사이에 찬반 의견과 수정안 요구가 거듭되자 이승만 국회의장이 발언권을 요구해 정리에 나섰다.

이 의장은 “우리가 지금 중대한 일을 먼저 생각해야 되니까 아무리 내 의견과 수정안이 있다고 해도 그 일은 지금 헌법 통과해서 정부 수립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는 것 같다. 미미한 점이 있더라도 넘겨가지고 하루바삐 제정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요, 애국심으로 생각한다”며 표결에 부쳤다. 그렇게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은 우리 헌법에 들어갔다.

76년 전 제헌의회 의원들 사이에서도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과 국회 재의결의 불가능함을 우려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이니까 3분지 2 이상의 찬성으로 된 것 별로 없고 과반수 의결이 많습니다…대통령의 결정 여하에 있어서 시행이 못될 지경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실제 문제에 있어서 대통령은 입법에 쓴 입법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입법권은 국회에 있고 행정은 대통령이라 작정이 있는데 대통령은 결국 입법권을 가지게 되면….”(백형남)

“제일 한 가지 문제 되는 점은 법률안을 대통령의 자기 의견대로 억제할 수 있는 이 불합리한…국회가 있는 이상 법률에 대한 입법권은 우리 국회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될 텐데도 불구하고 만일 법률안이 대통령 마음에 맞지 않으면 국회에 환부한다, 재의의 결과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법률로 발생을 한다는 조문이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해석할 것 같으면 재석의원 3분지 2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것 같으면 법률안은 법률로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으로 해석이 될 줄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국무총리하고 국무위원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게 뒀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상의 권리, 예산에 대한 권리, 비상대책의 문제, 국회의 입법에 대한 어떠한 권한까지 침해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난 날 가장 자기 마음대로 한 뭇소리니(무솔리니), 히틀러는 자기의 희망대로 헌법을 제정했어도 이보다 더 훌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이주형)

“입법권은 국회가 행한다 이랬습니다…국회와 대통령 사이에 알력과 마찰이 생길 조문을 만들지 않는가 하는 염려가 되는 것이고….”(김중기)

“국회에서 가결된 법률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말씀이에요. 그러면 우리 삼권분립 원칙에 있어서 국회의 기능은 무엇이냐 하면, 대단히 막연합니다…상원도 없어서 상원에 회부할 수 없고, 대통령이 거기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국회는 자문기관밖에 안 됩니다.”(윤재욱)

“대통령이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을 거부권을 행사 실행하게 된다고 하면 그야말로 국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문기관밖에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일 여기에 반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 국회의원 자신을 무시하고 우리 국회의 부탁을 배반한다고 생각합니다.”(이문원)

애초 유진오가 만든 헌법 초안에는 대통령 거부권이 없었다. 의원내각제 권력구조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 국회의장이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정부형태가 바뀌었고, 미국 헌법을 따라 거부권이 급하게 추가됐다.

거부권 1위 이승만, 2위 윤석열

국회 운영위원회 검토보고서를 보면, 1948∼2024년(9월25일 현재)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는 모두 87차례 있었다. 대통령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 45차례(재의결 24, 수정의결 6, 부결 9, 임기만료 폐기 5, 철회 1)
박정희 5차례(부결 1, 임기만료 폐기 3, 철회 1)
최규하 0
전두환 0
노태우 7차례(부결 4, 임기만료 3)
김영삼 0
김대중 0
노무현 6차례(재의결 1, 부결 2, 임기만료 폐기 3)
이명박 1차례(임기만료 폐기 1)
박근혜 2차례(임기만료 폐기 2)
문재인 0
윤석열 21차례(부결 10, 임기만료 5, 국회 계류 6)

‘공산국가를 빼고는 대통령 거부권이 다 있다’고 했던 이승만은 1948년 7월24일 대통령 취임 이후 12년간 모두 45차례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했다. 전체 87차례의 절반 이상(51.7%)을 차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재임 2년4개월 만에 헌정사에 기록된 거부권 행사의 4분의 1(21건, 24.1%)을 채웠다. 10월 초 거부권 행사가 ‘예정’된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과 지역화폐법을 포함하면 24차례(90건 중 26.7%)가 된다.

대통령 거부권 횟수 1·2위를 차지한 이승만·윤석열 두 대통령의 첫 거부권 대상이 모두 정부의 양곡 매입에 관한 것인 점이 눈길을 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등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9월29일 국회를 통과한 양곡매입법안에 대해 ‘정부가 정해진 양곡 예정량을 매입하기 힘들다’며 10월3일 첫 재의요구(거부)를 했지만, 국회는 사흘 뒤인 10월6일 이를 수정가결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안에 대해 2023년 4월4일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며 첫 거부권을 행사했다. 양곡관리법안은 국회 재의결에서 국민의힘 반대표로 부결됐다.

헌법재판연구원이 지난 12일 펴낸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의 역사와 행사 사유’(책임연구관 장효훈)는 이승만 대통령 시기 거부권이 잦았던 배경으로 △대통령과 국회의 견해 차이 △대통령 지지 여당 세력 부재 △정당제도 미확립·다수의 무소속 의원 등을 꼽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거부권을 통해 국회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해석이다. 다만 대통령과 국회 사이 갈등 전선이 컸던 탓에 거부 법안의 66.7%가 재의결·수정의결된 것이 현재와 다른 점이다. 이승만의 거부권 행사 사유 중에는 ‘대통령의 정책에 부합하지 않는다’가 31회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법률로 대통령 거부권 제한 가능할까

헌법의 대통령 거부권·재의결 조항은 제헌헌법이나 87년 헌법이나 대동소이하다. 87년 민주화 이후로 끊어보면 대통령 8명의 재의요구는 모두 37차례(김영삼·김대중·문재인 0건)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비율(21건, 56.8%)이 압도적이다. 남은 임기 내내 극한의 여소야대 상황이 지속하기 때문에, 여야 관계나 국정운영 방식에 변화가 없는 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본인 및 김건희 여사가 수사 대상인 채 상병 특검법(2차례)과 김건희 특검법(1차례)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두 특검법안은 최근 다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대통령실은 이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예고한 상태다. 이 경우 24차례 재의요구 중 무려 5차례(20.8%)가 본인 및 배우자 관련 수사에 대한 거부권 행사가 된다. 야당에서 ‘방탄 거부’라며 헌법 제정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거부권을 제한하는 법률안이 발의된 배경이다.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배준영 간사를 비롯한 여당 의원들이 야당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상정했다고 항의한 뒤 퇴장하고 있다. 이날 운영위는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발의한 대통령의 재의요구 권한 행사에 관한 특별법안, 김홍일 방지법(국회법 개정안) 등을 상정하고 국회운영개선소위에 회부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이 본인과 김건희 여사 관련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이를 제한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개정안(전현희 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은 사건의 수사·재판 등과 관련한 법률의 승인·거부 직무와 관련해, 해당 법률이 대통령의 사적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 대통령 스스로 회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25일 대통령 거부권을 직접 제한하려는 ‘대통령의 재의요구 권한 행사에 관한 특별법’(민주당 김용민, 조국혁신당 황운하 의원 대표발의)이 국회 운영위원회에 전격 회부됐다.

헌법은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 대통령은 국회에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다만 어떤 ‘이의’인지 명시적 내용은 없다.

거부권 행사 사유는 △헌법 위반 △정책 차이로 크게 나뉜다. 헌법학계에서는 △헌법 위반 △재정 부담 △집행 불가능 △국익 침해 △정부에 부당한 압력 △대통령 정책과 차이 등으로 거부권 행사가 정당화하는 사유를 나누기도 한다.

정부 압력이나 정책 차이로 인한 거부권 행사가 특히 논란의 대상이 된다. 대통령 생각이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면 국회가 가진 입법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 대통령 거부권 원조국가인 미국에서도 논란이 되는 지점이다.

국회 운영위 검토보고서를 보면, 윤 대통령이 그간 거부권을 행사한 사유는 △절차적 문제 18 △정치적 중립성 훼손 14 △헌법 위반 13 △국민부담 증가 8 △형평성 문제 6 △법적 안정성 위협 4 △실효성 부족 4 △재정 부담 2 등이었다.

‘절차적 문제’ ‘정치적 중립성 훼손’ ‘헌법 위반’ 3가지 사유를 동시에 언급한 것이 전체 21차례 재의요구 가운데 7차례(33.3%), 2가지 이상 언급한 경우는 18차례(85.7%)였다. 용산 대통령실이 국회에 보낸 재의요구서에는 보통 △거대 야당 일방이 충분한 합의 없이 처리한 법률안의 내용이 △야당 또는 야당의 지지기반에 유리하므로 공정하지(중립적이지) 않거나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논리로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학계에서는 대통령이 자기 생각과 다른 법안을 거부할 때 표면적으로 헌법적 사유를 내세우곤 한다고 지적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본인과 부인 김건희 여사를 수사 대상으로 하는 특검법안 역시 이런 사유를 들어 거부를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윤 대통령처럼 ‘직접적 이해관계’에 있는 법안의 거부권을 노골적으로 행사한 대통령은 누구도 없다는 점이다.

야권에서는 윤 대통령이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를 헌법적 문제로 ‘포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번에 발의된 대통령 거부권 제한 특별법이 ‘본인·배우자 또는 4촌 이내 혈족·인척의 범죄 혐의와 관련되는 경우’에 재의요구 회피 의무를 두게 된 배경이다.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인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 역시 대통령의 사적 이해관계자가 수사·재판 대상인 법안의 경우 대통령의 회피 의무를 담고 있다.

헌법학계에서는 무분별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국회 입법권 침해라는 해석론, 헌법에 거부권 사유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이를 제한하는 것이 오히려 권력분립 원칙을 훼손한다는 해석론이 각각 맞서고 있다.

법제처와 법무부는 국회 운영위에 대통령 거부권 제한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냈다. △헌법에 재의요구 사유에 대한 제한 규정이 없으며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 권한을 법률로 침해하고 △권력분립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거부된 법안에 대해서는 국회 재의결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국회 과반 의석을 갖는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국민의힘이 불참한 채 대통령 거부권 제한 특별법과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단독 처리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결국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법을 통한 대통령 거부권 제한은 현실성이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개헌을 통해 국회 재의결 정족수를 현행보다 완화하거나, 거부권 행사 사유를 구체적으로 정하는 방법도 있지만 현실 정치에서 개헌 논의는 좌초를 거듭하며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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